♠ study방/유명시

폭포/이형기

미스커피 2012. 1. 10. 20:14

폭포(瀑布)

희망의 문학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희망의 문학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희망의 문학 지은이 : 이형기(李炯基)

희망의 문학 갈래 : 자유시. 서정시. 관념시

희망의 문학 율격 : 내재율

희망의 문학 성격 : 관념적, 서정적

희망의 문학 어조 : 시적 화자는 '산'으로 자신의 상처를 비극의 어조로 드러내고 있음

희망의 문학 심상 : 감각적 심상으로 하강의 이미지

희망의 문학 구성 :

1연 : 시퍼런 칼자욱 - 산에 형성된 칼자욱과 같은 폭포

2연 : 벼랑의 직립 - 벼랑에 형성된 폭포

3연 : 장수 잠자리 - 폭포의 모습

4연 : 맹목의 눈보라 - 무언가에 떨어져 흩어지는 폭포

5연 : 2억 년 묵은 칼자욱 - 변하지 않은 폭포

희망의 문학 제재 : 벼랑과 폭포가 있는 산

희망의 문학 주제 : 존재에 대한 비극적, 파괴적 속성에 대한 인식

희망의 문학 표현 :

  내재적 운율을 지니고 있으며, 각 연을 4행으로 배치하면서 1, 3, 5연의 '그대 아는가', '아는가'라는 동음 반복, '그대 아는가 ~을 아는가'의 통사 구조 반복을 통해 내재된 운율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또한 시의 앞뒤에 유사한 내용을 배치한 수미상관의 구조 역시 운율을 형성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운율마저 규칙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3연에서처럼 도치를 통한 통사 구조의 반복에 변화를 줌으로써 다양화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

  관념적 이미지로 자연적 소재를 바라보고 있으며, 시적 대상을 직접 드러내지 않은 채 암유의 기법을 활용하고 있음.

희망의 문학 출전 : <적막강산>(1963)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등, 샘명체의 배의 반대쪽]을[나의 등판 : 여기서 '나'는 산을 가리킨다. 즉 산 자신의 한 부분을 등판으로 표현 했다. 의인법적 표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위에서 아래로 내려친 / '산'을 타고 길게 내려 뻗은]

시퍼런 칼자욱[산의 한 부분에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모습이 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인간 이면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 삶의 모습을 '칼자욱'으로 표현하였고, 인간의 근원적 비극성을 느끼게 함. / 장수잠자리, 맹목의 눈보라]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무시무시한 속도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표현]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 : 숨이 끊어질 때의 마지막 힘을 쓰는 정황을 이르는 말)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 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벼랑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 실존적 한계를 느끼면서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비극적 모습을 표현함]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산 스스로 품고 있는 폭포의 하강을 자멸이라는 비극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폭포로 인한 산의 모습은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역설적 표현임. 다시 말해서 폭포의 장관은 산의 자랑거리일 수 있으나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존재의 비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뜻 ]

무수한 복안(複眼 : 눈이 여러 개 모여서 이루어진 눈)들이[폭포의 수많은 물방울]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 : 사리에 어두운 눈, 또는 그러한 안목)의 눈보라[맹목(盲目)의 눈보라 : 아무런 목적도 없이 떨어지는 폭포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폭포수의 떨어짐을 자연 현상 그 자체로 이해할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폭포의 형성 시기 / 삶의 역정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은 고통의 멍에. 폭포는 산에게 있어 오래된 상처이자 고통이다.(존재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인식)]을 아는가.


- 김수영의 '폭포'는 소시민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선구자적 인물로 비유되고 있지만, 이형기의 '폭포'는 폭포의 모습을 통해 현실적 고통에 절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산과 폭포라는 자연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순수한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산의 절벽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존재를 칼자욱이라는 섬뜩한 고통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의 이미지가 산 자신이 주체가 되어 구체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물 인식은 비극적이기조차 하다. 자연이 자연 자체로의 아름다움으로만 묘사되어 있지 않을 이 시를 통해 경험하게 된다. 자연은 우리 시에 있어서의 전통적 소재라 할 수 있다. 고전 작품 속에서의 자연은 인간에게 위안과 휴식을 제공하는 긍정적 존재로 등장한다. 또한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묘사되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 시의 자연 인식은 전통적 인식과는 상이하다.

 그리고, 서정시는 대상을 파악하는 어느 한 순간의 가장 강렬하고 고양된 마음의 상태를 본질로 한다. 이 작품의 대상으로 채택된 폭포는 산의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내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대상은 단지 자연적인 소재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관념적인 이미지를 투사(投射)시킨 형상물이다. 이 시의 발화 주체인 '나'는 시인이 아닌 '산'이며, 오히려 시인은 그 상대역으로서 청자인 '그대'가 되고 있다. 벼랑을 가로질러 내리친 칼자욱의 모습은 주체인 '산'의 입장에서 보면 지울 수 없는 고통의 멍에가 되며, 여기서 시인은 삶의 일상에서 느끼는 존재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라는 관념을 떠올리게 된다.

 산 자체가 시적 화자가 되어 고통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았는데, 1연에서 '그대'는 사람이고 '나'는 산인 것이다. 자신의 몸에 칼자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2연에서는 섬뜩한 속도감과 벼랑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모습이 장수잠자리로 묘사되어 드러나고 있다. 4연에서는 떨어지는 폭포의 시퍼런 물줄기가 자신에게는 아주 오래된 상처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는 자연 현상을 객관적 시각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적 체험을 바탕으로 주관의 비극적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이 시는 산과 폭포라는 자연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순수한 정서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지 않다. 산의 절벽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존재를 칼자욱이라는 섬뜩한 고통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의 이미지가 산 자신이 주체가 되어 구체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물인식은 비극적이기조차 하다. 자연이 자연 자체로의 아름다움으로만 묘사되고 있지 않음을 이 시를 통해 경험하게 된다. 자연은 우리 시에 있어서의 전통적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고전 작품 속에서의 자연은 인간에게 위안과 휴식을 제공하는 긍정적 존재로 등장한다. 또한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묘사되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 시의 자연 인식은 전통적  인식과는 상이하다.>

이해와 감상1

 이 시는 산과 폭포라는 자연물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순수한 정서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지 않다. 산의 절벽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존재를 칼자욱이라는 섬뜩한 고통의  이미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의 이미지가 산 자신이 주체가 되어 구체화되고 있다. 이러한 사물인식은 비극적이기조차 하다. 자연이 자연 자체로의 아름다움으로만 묘사되고 있지 않음을 이 시를 통해 경험하게 된다. 자연은 우리 시에 있어서의 전통적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고전 작품 속에서의 자연은 인간에게 위안과 휴식을 제공하는 긍정적 존재로 등장한다. 또한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묘사되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 시의 자연 인식은 전통적  인식과는 상이하다.

 이형기는 시적 대상을 보다 내면화된 영역으로 끌어들여, 소위 '정감의 미학'을 추구함으로써 서정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감각성을 살리기 위해 치밀한 언어의 구사에 노력하지만, 화려한 수사에 빠지지 않음은 물론, 자연에 대한 친애감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정서의 단순성을 극복하고 내밀한 자기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첫 시집 '적막강산'에 이어 '돌베개의 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에는 자연에 대한 지향과 함께 자기 존재에 대한 고독한 상념들이 주로 등장한다.

 이 시도 정교한 언어 구사를 통해 일상적 삶에서 느끼는 존재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의 대상인 '폭포'는 산의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폭포'는 단순히 자연적 소재가 아니라, 시인의 뛰어난 상상력에 의해 관념적인 이미지를 투사(投射)시킨 형상물이다. 또한, 이 시의 발화 주체인 '나'는 시인 자신이 아닌 '산'이며, 시인은 그 상대역으로서의 청자인 '그대'가 되어 있다.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 시퍼런 칼자욱'의 모습은 주체인 '산'의 입장에서 보면, 지울 수 없는 고통의 멍에이며, 연속된 '벼랑의 직립'에서 '박살나는 맹목의 눈보라'를 피우며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은 현실적 고통으로 인해 끝없이 절망하는 실존적 존재인 인간 삶의 투영이다. 추락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한계를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하늘 높이 날'고자 하는 인간 존재의 비극적 모습이 미약한 '장수잠자리'를 통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인간적 삶이 거세된 암담한 현실 속에서, 진실된 양심의 소리를 세차게 토해 내는 '깨어 있는 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김수영의 <폭포>와는 전혀 다른 '폭포'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1연) 폭포의 모습을 관념적 이미지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는 연이다.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에 내리쳐 생긴 칼자욱으로 이미지를 이동시켰다. 존재의 고통을 감각화시켜 표현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비극성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2연) 떨어지는 폭포와는 대조적인 절벽의 모습이 그려진 연이다. 전율을 느끼게 하는 추락과 그 끝에 이어지는 단말마적 비명과 극한적 고통을 느끼게 하기 위해 절벽은 그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3연) 조산운동에 의해 폭포가 형성되었던 때인 석탄기에 추락사한 장수잠자리의 이미지로 폭포를 그리고 있다. 단순한 물결의 흘러내림이 아닌 생명체의 비극적 죽음으로 그 이미지를 투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4연) 바위에 부딪쳐 떨어지는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연이다. 장수잠자리의 무수한 수정체가 박살이 나서 흩어지는 상황을 한마디로 '자멸'이라고 파악한다.

(5연) 폭포를 삶의 역정에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상처로 남은 고통의 멍에로 인식하여 표현한 연이다.

 서정시는 대상을 파악하는 어느 한 순간의 가장 강렬하고 고양된 마음의 상태를 본질로 한다. 이 작품의 대상으로 채택된 폭포는 산의 깎아지른 벼랑을 타고 내리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 대상은 단지 자연적인 소재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관념적인 이미지를 투사시킨 형상물이다. 이 시의 발화 주체인 '나'는 시인이 아닌 '산'이며, 오히려 시인은 그 상대역으로서 청자인 '그대'가 되고 있다. 벼랑을 가로질러 내리친 칼자욱의 모습은 주체인 '산'의 입장에서 보면 지울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의 멍에가 되며, 여기서 시인은 삶의 일상에서 느끼는 존재의 비극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이라는 관념을 떠올리게 된다.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희망의 문학 이형기 시의 사물 인식

 "이형기씨는 기존 사물들에 대한 가치를 뒤바꾸는 데에서 그 쾌적함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뒤바꿈으로써 사물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그를 제시하기 위해서 흔히 말하는 서정성을 배제한다. 서정성 대신 이형기씨는 드라이한, 간결한 산문체의 묘사를 취한다. 묘사는 은유나 상징과 같은 회피의 원리에 주로 의지하고 있는데, 이는 사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니라, 직접성을 피한 우회적 모습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다." - 홍신선, '가치 바꿈의 방법과 의미'에서 -

희망의 문학 자연이라는 소재의 의미와 암시성

 전통적 인식과 달리 이 시에서 자연은 아름답게 드러나지 않는다. 산 자체가 화자가 되어 고통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연)에서 '그대'는 사람이고 '나'는 산이다. 자신의 몸에 칼자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2연)에서는 섬뜩한 속도감과 벼랑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3연)에서는 벼랑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모습이 장수잠자리로 묘사되어 드러나고 있다.

(5연)에서는 떨어지는 폭포의 시퍼런 물줄기가 자신에게는 아주 오래된 상처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는 존재에 대한 시인의 비극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 시는 자연 현상을 객관적 시각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적 체험을 바탕으로 주관의 비극적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희망의 문학 시적 대상의 다양한 파악 방식

 자연적 대상인 '폭포'를 동일한 제재로 삼은 시라도 시인이 대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제시하는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이 시와 같은 제목의 김수영의 '폭포'는 사회적 상황의 맥락에서 깨어 있는 자, 의식 있는 자로서의 '폭포'가 설정되고, 인간다운 삶이 거세된 암담한 현실 속에서 세차고도 진실된 양심의 소리를 토해 내는 살아 있는 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희망의 문학 실존주의 實存主義 (existentialism)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생(生)의 철학’이나 현상학의 계보를 잇는 이 철학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문학이나 예술의 분야에까지 확대하여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한 유행사조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 성립 당초의 실존주의의 주장 내용이 희미해져 실존이란 말뜻도 애매해진 감이 없지 않다. 실존주의 철학을 초기에 수립한 야스퍼스나 하이데거를 오늘날 실존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실존이란 말은 원래 철학용어로서 어떤 것의 본질이 그것의 일반적 본성을 의미하는 데 대하여, 그것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여, 옛날에는 모든 것에 관해 그 본질과 실존(존재)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서는 실존이란 특히 인간의 존재를 나타내는 술어로 사용된다. 그것은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하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향의 선구자로서는 키르케고르나 포이어바흐를 들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하고(키르케고르), 따라서 인류는 개별적인 ‘나’와 ‘너’로 형성되어 있음을 주장했으며(포이어바흐),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이 실존주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야스퍼스의 ‘실존’을 예로 들면, 실존이란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思惟)하고 행동하는 근원’이며, ‘자기 자신에 관계되면서 또한 그 가운데 초월자(超越者)와 관계되는 것’이지만, 한편 그러한 실존은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실존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진리는 ‘좌절하는 실존이 초월자의 다의적(多義的)인 언어를 지극히 간결한 존재확신으로 번역할 수 있을 때 존재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분류에 따르면 이와 같은 초월자 또는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는 야스퍼스나 마르셀은 ‘유신론적(有神論的) 실존주의자’이고, 사르트르 자신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임을 주장한다. 즉 사르트르의 생각으로는, 인간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先行)하며, 따라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완전히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져 있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결정되어 있다면 개인은 다만 그 결정에 따라 살아가기만 하면 되지만, 본질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 한사람 한사람의 자각적인 생활방식이 실로 중요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짐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생긴, 자유와 니힐리즘을 표방하는 실존주의의 한 파(派)는 사르트르의 아류(亞流)로서, 사르트르의 자유에 관한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는 이 밖에 L.셰스토프, N.A.베르자예프, 부버를 들 수 있고, 문학자로는 사르트르 이외에 카뮈, 카프카 등을 들 수 있으며, 실존주의의 시조(始祖)로서는 F.W.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 나아가서는 B.파스칼까지도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바르트나 불트만 등의 변증법 신학자가 실존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개인의 실존을 중시한다는 점일 뿐, 그 사상 내용에는 상당한 차가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희망의 문학 실존주의 문학 實存主義文學

 1940~1950년대에 프랑스에 전개된, 실존주의 사상이 짙게 반영된 문학으로 이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명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주의라는 용어를 협의로 사용하느냐 혹은 광의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유동적이다. 넓은 견지에 설 때 우리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의심, 삶에 대한 근원적 반성, 새로운 생존의 길의 모색 등을 보이는 모든 문학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현대문학에 이르는 동안에 나타난 수많은 문학사상과 작품에 대해서 ‘실존주의적’ 또는 적어도 ‘실존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근래에 이런 문학적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20여 년 간이었다. 러시아 혁명(1918), 세계적 경제위기(1929), 나치즘의 지배적 세력(1933 이후), 에스파냐내란(1936), 제2차 세계대전(1940), 그리고 그 후의 미 ·소간의 냉전, 엄청난 과학의 힘, 약소국가들의 대두 등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이성과 자유의 승리를 믿어온 낙관주의적이며 서유럽 중심적인 사상에 치명상을 입히고 기존의 가치체계의 전적인 붕괴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1940년을 전후한 프랑스의 많은 작가는 사회와 생존의 현실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새로운 바탕 위에서 삶의 의미를 괴롭게 추구하려는 공통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말로, 생텍쥐페리, 베르나노스는 이미 전전(戰前)부터 역량을 보인 작가들 중의 대표적 존재이며, 전후에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그리고 카뮈에 의해서 이 경향이 한결 심화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1947년경부터 저널리즘이 크게 유행시킨 실존주의라는 단어가 이들의 활동을 지칭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전전(戰前)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파스칼, 심지어는 그리스의 비극작가들을 그 사상적 선조(先祖)로 보려고 하였다. 이상이 넓은 의미에서 사용될 수 있는 실존주의 문학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을 협의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누구보다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문학적 표현을 가리킨다. 사실에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철학과 창작활동을 긴밀히 연결시켰던 사람이다. 그는 특히 《존재(存在)와 무(無)》(1943)에서 인간 존재의 우연성, 의식과 대상의 관계, 인간이 타고난 괴로운 자유, 타인과 나의 존재론적 관계, 일정한 상황 속에서의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서 생성(生成)되어 나가야 할 우리의 운명 등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와 후설의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이 철학적 성찰은 순리적(純理的)이며 사변적(思辨的)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양태와 행위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실존적 모습에 대해서 뜻깊은 조명을 던진다는 커다란 이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은 문학과 상통할 수 있는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와 무》를 비롯한 그의 철학적 저작에 표명된 인간관의 형상화(形象化)이며, 문학적 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토(嘔吐)》(1938)로부터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를 거쳐 《알토나의 유폐자(幽閉者)》(1960)에 이르는 수많은 소설과 희곡과 평론은 개인적 차원에서, 또 후기에는 사회적 차원에서 삶의 상황을 응시하고 분석하고 초월하려는 그의 매우 지적(知的)인 태도의 표현들이다.

 이렇듯 실존철학을 밑에 깔고 있는 사르트르의 문학이 그 시대의 가장 큰 주목의 대상이 되자 보부아르와 카뮈도 역시 그와 동류의 작가로 취급되었다. 물론 그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보부아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르트르와 흡사한 사상을 작품에 담았다. 그러나 그녀는 사르트르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감성(感性)과 여성의 존재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카뮈는 《이방인(異邦人)》(1942)과 《시시포스의 신화》(1942)에서 이른바 부조리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구토》의 사르트르와 동질적인 작가로 속단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두 작가의 사상적 ·감성적 출발점이 매우 다르고 그들의 도달점은 오히려 대극적(對極的)이라는 것이 더욱 더 밝혀지고 있다. 1951년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나오자 일어났던 두 사람의 극적(劇的)인 충돌은 그들을 갈라놓고 있는 거리가 지극히 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카뮈 자신은 그 후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사적 견지에서 볼 때 제 나름대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와 새로운 윤리의 모색을 시도한 이들의 문학을 ‘실존주의 문학’이라고 한데 묶어 부르는 것이 전적으로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이 명칭 속에 그리스도교적 입장에 선 마르셀의 작품이나 무니에의 평론이 의당 포함되며, 프랑스 이외의 지역의 작가, 가령 콜린 윌슨이나 그레엄 그린 등의 작품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사전)

희망의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