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1967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첫 시집 『달하』를 비롯하여 『누이』,『다보탑을 줍다』, 『거짓말로 참말하기』 등 시집 13권.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거짓말로 참말하기
지금은 없어진 공산주의 시대였다
루마니아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의 공부였단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죠?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요 여러분의 어머니는 누구죠? 엘레나 차우세스쿠요 잘 대답했어요. 여러분은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어요? 고아(孤兒)요 (한 신문에 실린 이 풍자로 관련자들 모두 체포되었다고 한다)
소련의 아이들과 어른들의 대화였단다 생일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니? 한 아이가 얼른 대답했다 투르먼 대통령한테 뺨맞고 싶어요 깜짝 놀란 어른이 까닭을 묻자, 그 어린이는 내가 미국 아이이거나 투르먼이 우리 대통령일 테니까요 (이 풍자만화의 관련자들은 전원 체포되었다고 한다)
어느 위성국가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내 방송이었단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 비행기는 곧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합니다 담뱃불을 끄고 의자를 바로 세우고 안전벨트를 매어 주세요 그리고 손목시계를 10년 뒤로 돌려주세요 (이 풍자만화로도 관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체포될수록 풍자의 인기가 급상승될뿐더러, 포화 상태의 수용소 비용을 줄이려고 기 수감자들도 다 석방했는데, 이는 흐루시초프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놀랍고 기발한 발상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안경, 잘 때 쓴다
자기 전에 안경을 닦는다 책 속에 꿈이 있는 줄 알고 책 읽을 때만 썼던 안경을 총기가 빠져나간 눈에 열정이 빠져나간 눈에 덧눈으로 씌운다
잠은 어두우니까 더 밝은 눈이 필요하지 감긴 눈도 뜬눈이 되어 지나쳐버리는 꿈도 놓치지 않게 되고 꿈도 크고 밝은 눈을 쉽게 알아볼 것 같아 자투리 낮잠을 잘 때도 반드시 안경을 쓰는데
꿈이 자꾸 줄어드니까 새 꿈이 안 오니까 꿈을 더 잘 보려고 꿈한테 더 잘 보이려고 멋진 새 안경을 특별히 맞췄는데 새 안경이 없어졌다 다리는 새 걸로 바꾸지 말걸 그랬어.
다보탑을 줍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多寶塔)을 주웠다
국보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釋尊)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 치고 지나간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차려 다시 보면 빼알간 구리동전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기러기 서릿길
헤매어온 인생에서 묻어나는 늦가을 냄새와 헤매임이 남아 있는 눈빛에 얼비치는 초겨울 빛깔로 만났다고 하랴 헤어졌다 하랴 헤매였던 곳곳의 은혜와 굴욕을 삭인 쉰 목청으로 저녁 바람이 불고 늦게 핀 들국화 이우는 떨기 앞에 목놓아 큰 울음도 바쳐봐야 한다 그런 다음 침묵으로 길을 묻는 無心 청년 예수도 젊은 싯다르타도 서릿길 이런 때 詩聖이 되셨으리
문병가서
밤비에 씻긴 눈에 새벽별로 뜨지 말고 천둥번개 울고 간 기슭에 산나리 꽃대궁으로 고개 숙여 피지도 말고
꽃도 별도 아닌 이대로가 좋아요.
이 모양 초라한대로 우리 이 세상에서 자주 만나요 앓는 것도 자랑거리 삼아 나이 만큼씩 늙어 가자요.
들꽃 언덕에서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값없는 들꽃은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을.. 그래서 들꽃 향기는 하늘의 향기인 것을.. 그래서 하늘의 눈금과 땅의 눈금은 언제나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것도 들꽃 언덕에서 알았다.
마음 착해지는 날
살았던 곳들은 모두 다 고향들이었구나 괄시받은 곳일수록 많이 얻고 살았구나 행차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지만 갈지자로 세상을 살고 나서 불현듯 마음 착해지는 날은 울고 싶은 사람 뺨쳐주는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악역이라도 자청하고 싶어진다.
기 적
진실은 없었다
모든 게 진실이었으니까
좋음만도 아니었다 아름다움만도 아니었다 깨끗함만은 더욱 아니었다
아닌 것이 더 많아 알맞게 섞어지고 잘도 발효되어
향기는 높고 감칠맛도 제대로인 피와 살도 되었더라
친구여 연인이여
달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도 떫고 아린
우정도 사랑도 인생이라는 불모의 땅에 태어나준
꽃이여
서로의 축복이여
기적은 없었다 살아온 모두가 기적이었으니까
꽃으로 잎으로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며 뭐니뭐니 해도 사랑은 아름답다고
돌아온 꽃들 낯 붉히며 소곤소곤 잎새들도 까닥까닥 맞장구 치는 봄날
속눈썹 끄트머리 아지랑이 얼굴이며 귓바퀴에 들리는 듯 그리운 목소리며
아직도 아직도 사랑합니다 꽃지면 잎이 돋듯 사랑진 그 자리에 우정을 키우며
이 세상 한 울타리 안에 이 하늘 한 지붕 밑에
먼 듯 가까운 듯 꽃으로 잎으로 우리는 결국 함께 살고 있습니다
봄 노래 - 사랑 유안진 봄아 하고 혼자 부르는 이름은 아리까리 떠오를 듯 안 잡히는 아지랭이
봄아 봄아 밤중에 불러 보는 목마른 일므은 잊어질까 겁이 나 울며 피는 진달래꽃
봄아 내 사랑아 푸른 숨결 몰아 쉬며 마지막 불러 보면 눈물 매운 초록 잎새 키 크는 내 슬픔.
4 月歌 · 봄봄봄 유안진 붉은 꽃을 바라보며 오도카니 앉아 턱 괴고 앉아 묻는다. 아직도 사랑하느냐고.
초록 잎새 만져 보다가 눈을 감고 가슴에 손 얹고 묻는다. 아직도 미워하느냐고
심장아, 죽음을 보아야 뜨거워질까.
심장아,
네게로 열리는 마음 확인하고 거듭 확인하는 눈물 눈물의 봄비 속에
뻑, 뻐꾹 쇠망치 소리 마음 대문짝에 못질하는 망치 소리 이성(理性)의 꾸짖음.
月歌 · 봄비 유안진 봄아 내 마른 입술로 너를 부르면 갈증이 가시어지는 아프고 쓰린 기쁨은
한 생애를 꽃웃음에 밝히고 싶구나 한 생애를 꽃향기에 까무치고 싶구나 한 생애를 기쁜 울음에 적시고 싶구나
생활의 빈틈에선 피리 부는 네 목소리 술렁대는 소문 듣고 젖은 가슴 말려주며 꽃수레 달려오는 길목 먼지 일라 뿌리는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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