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꾸러미방/끄적끄적

(조지훈)낭송 선택 할 시

미스커피 2012. 5. 25. 00:07

 

 

꿈 이야기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병(病)에게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

그 날의 메아리를 듣는 것일세.

 

생에의 집착과 미련은 없어도 이 생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지옥의 형벌이야 있다손 치더라도

죽는 것 그다지 두렵지 않노라면

자네는 몹시 화를 내었지.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는 무슨 일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좀 이상한 성밀세.

언짢은 표정이나 서운한 말, 뜻이 서로 맞지 않을 때는

자네는 몇 날 몇 달을 쉬지 않고 나를 설복(說服)하려 들다가도

내가 가슴을 헤치고 자네에게 경도(傾倒)하면

그때사 자네는 나를 뿌리치고 떠나가네.

 

잘 가게 이 친구

생각 내키거든 언제든지 찾아 주게나.

차를 끓여 마시며 우린 다시 인생을 얘기해 보세그려.

 

 

 

다부원(多富院)에서


한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공방의 포화가
한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옆에 쓰러진 괴뢰군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으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마음의 태양

 


꽃 사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높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맑은 넋을 살게 하자.

가시밭길 넘어 그윽히 웃는 한 송이 꽃은
눈물의 이슬을 받아 핀다 하노니
깊고 거룩한 세상을 우러르기에
삼가 육신의 괴로움도 달게 받으라.

괴로움에 짐짓 웃을 양이면
슬픔도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 나라의 원광(圓光)은 떠오른다.

푸른 하늘로 푸른 하늘로
항시 날아오르는 노고지리 같이
맑고 아름다운 하늘을 받들어
그 속에 높은 넋을 살게 하자

 

. - 산상(山上)의 노래 -    조지훈   낭송/이화영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고풍의상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드리운 주렴에 반월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고와라 고와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호장 저고리 하얀 동정이 화안이 밝도소이다

열두 폭 긴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

호접인 양 사뿐히 춤추라 아미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눈 감고

거문고 줄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양 가락에 맞춰

흰 손을 흔들어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