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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방/★좋은시★

비파나무 그늘 /마경덕

by 미스커피 2011. 12. 19.

비파나무 그늘

                                  마경덕

  

일제히 소인을 찍고 있는 나무들,

봄부터 쓴 장문의 편지들이 쏟아진다

허공에 쓰는 저 간절한 필체들

해마다 발송되는 편지들은 모두 어디로 가나

 

켜켜이 쌓인

주소불명, 수취거절, 수취인부재

미처 소인도 찍지 못한, 저 미납의 사연들

 

비파를 타던 그 사내

단물이 흐르는 목소리를 내 일기장으로 옮겨오곤 했다

그 소리를 만지며 사나흘 울었다

울음소리에 비파나무 귀는 파랗게 자라

그때 나를 찢고 다시 썼다

 

몸은 기억한다

그때 우리는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손끝이 스칠 때 비파나무 그늘도 가늘게 떨렸다

빗물에 젖은 열개의 손가락으로 그의 갈비뼈를 더듬고 싶었다

끈끈한 시간의 뒷면에 혀를 대면

그는 떨어진 우표처럼 기울어 있다

 

우체국은

마감된 하루를 가지 끝에 내건다

어둑한 그늘 아래 시큼한 연애가 익어가고

비파를 켜듯, 그 사내를 연주하고 싶던

그 가을

건너간 마음이 수취인불명으로 걸어나온다

 

한 다발의 묵은 편지를 태우듯

노랗게 발등으로 떨어지는 기억을 털어내는

우체국 앞 나무들

키 큰 비파나무가 마지막 현을 퉁긴다

수없이 반송된 계절이 또 한 페이지 넘어간다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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