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요점 정리
지은이 : 신동집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주지시
운율 : 내재율
성격 : 철학적,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관념적, 상징적
제재 : 오렌지
어조 : 사색하며 탐구하는 존재,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관념적 목소리
심상 : 상징적 심상이 주로 사용됨(시각적, 촉각적, 미각적)
구성 :
1연 : 단순한 사물 그 자체로서의 오렌지의 모습(우리가 오렌지 같은 사물을 이해하는 것은 그 외면(外面)으로서이다. 오렌지를 만져 본다고 해도 우리가 손을 대는 것은 그 거죽일 뿐, 진정한 내면(內面)은 보지 못한다.)
2연, 3연 : 일상적 사물로서의 오렌지, 사물의 외면만을 바라보는 그릇된 인식(제2연은 나는 오렌지의 껍질을 벗겨낼 수도 있다. 일상에서라면 그런 오렌지, 내가 마음대로 껍질을 벗기고 맛을 볼 수 있는 오렌지만이 문제가 된다. 제3연은 마음을 먹는다면 오렌지의 속살까지 깔 수도 있다. 일상(日常)에서라면 역시, 그런 오렌지만이 문제될 것이다.)
4연 : 본질적 의미로서의 오렌지, 존재 본질로서의 오렌지의 모습(그러나 오렌지의 본질, 사물의 본질(本質)에 손을 댈 수는 없다. 껍질을 벗겨 내거나 속살을 까기 위해 손을 대는 순간, 그것은 이미 오렌지가 아니다. 즉 본래의 사물이 아니다.)
5연 :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고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나의 절망감(사물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지금, 나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로 시간만이 흐른다.)
6연 : 이해될 것도 없는 사물의 본질, 존재의 본질에 대한 희망이 어린 예감 (그러나 어느 순간 오렌지의 거죽에, 그 사물의 의미를 깨닫게 해 줄 것 같은 무엇인가가 보이는 듯하다. 무엇인지 지금은 잘 알 수 없지만. )
주제 : 존재의 본질과 진정한 삶의 의미 추구
표현 :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구체적 언어를 통해 표현했고, 상징적 표현이 풍부하게 구사되어 있으며 반복법이 사용됨,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관념적인 목소리
출전 : 누가 묻거든(1989)
내용 연구
오렌지라는 한 사물을 소재로 하여,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물의 본질적 의미를 추구한 주지주의 계열의 작품이다. 사물의 겉(일상적)과 속(본질)의 의미를 대조시켜 존재의 참다운 본질 파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오렌지'는 인간과 맞서 있는 대상 세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인간이 오렌의 껍질을 벗기거나 아니면 '찹잘한 속살'을 까는 순간 오렌지는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오렌지는 '껍질'이나 '속살'로 분해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 오렌지를 파악하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오랜지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고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나와 대상 세계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소 막연하기는 하지만 바로 그와 같은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오렌지(존재의 본질이 파악되기 이전의 관념적 대상으로서의 '오렌지',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의 '꽃')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손을 댄다'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행위를 상징한다. 사물의 본질은 가공하거나 꾸밀 수 없는 것이므로 본질 파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序詩)'와 유사한 면이 많다. 존재의 본질은 사물을 인식하고 의미를 통해서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파악할 수 있지만, 이 두 시의 시적 화자는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한다. 이 시에서 '오렌지'는 다양한 의미 해석이 가능하다. 이 시에서는 외면과 내면의 대립을 통해서 존재의 본질 추구의 어려움을 그려내고 있으므로, 그러한 의미에 부합하는 '삶', '사랑', '신의 섭리', '진정한 예술 작품' ' 존재 본질의 그 자체, 복제가 불가능한 명작, 인생의 목적 등으로 '오렌지'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지만, '오렌지'는 원관념이 직접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아 무엇을 나타내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추측할 수 있다. 이 시는 원관념이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어 난해한 느낌을 준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오렌지를 만져 본다고 해도 우리가 손을 대는 것은 그 껍데기일 뿐, 진정한 내면이나 본질은 파악할 수가 없다. 이 시에서 '오렌지'는 단순한 대상으로서의 오렌지가 아니라 관념적 대상으로서의 사물을 말한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존재의 의미가 파악되기 이전의 단순한 오렌지를 뜻한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오렌지는 인식의 대상인 동시에 주체임. 오렌지와 나는 대등한 관계이며, 내가 사물의 존재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사물도 나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함을 나타낸다. 여기서 모든 존재 사이의 관계는 상호적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 단순한 사물 그 자체로서의 오렌지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 내가 사물의 존재에 대해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밑바닥에는 내가 대상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하고 또한, 나의 존재 의미도 대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인식의 대상인 동시에 주체임
마음만 낸다면(사물의 외면에 관심을 갖는다면) 나도
오렌지[일상적 오렌지, 사물의 현상]의 포들한(부드럽고 도톰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일상적 행위, 사물의 본질은 도외시한 채 사물의 외면에만 관심을 갖는 그릇된 인식 태도의 표현]
마땅히 그런 오렌지(일상적 사물로서의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우리는 겉모양이나 색깔 등의 외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는 뜻)- 일상적 사물로서의 '오렌지'(사물의 외면에만 관심을 갖는 태도의 문제점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차갑고 달착지근한) 속살을 깔 수 있다.[사물의 본질은 도외시한 채 사물의 외면에만 관심을 갖는 그릇된 인식 태도의 표현]
마땅히 그런 오렌지(존재의 외면만을 대상으로 한 오렌지, 일상적 사물로서의 오렌지)
만이(화자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런 오렌지만이 문제라는 뜻이다. 조사 '만'을 의도적으로 다음 행에 행간 걸침한 것은 앞행의 오렌지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또한 '만이'와 '많이'의 유사한 음으로 인한 중의적 표현일 가능성이 있다) 문제가 된다.(우리는 겉모양이나 색깔 등의 외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는 뜻)
그러나 오렌지[본질적 의미로서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아무도 존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본래의 사물)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대는 순간 -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 오렌지를 파악했다고 느끼는 순간 오렌지는 객체에서 주체로 바뀌어 있다] - 본질 파악의 어려움
그러나 오렌지에 - 나를 보고 있다. : 오렌지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손을 대는 순간, 즉 '오렌지는 어떠어떠한 것이다'라는 순간, 이미 오렌지는 그 정의와는 상관없는, 생명을 가진 본질적인 존재로 되돌아가, '나' - 생명을 가진 또 다른 존재 - 와 대치한다는 뜻이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사물의 본질인 '오렌지'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끝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절망하는 모습으로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한 만족을 채우지 못한 불안한 심리적 상황을 위험한 상태로 표현.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序詩)'와 유사한 면이 많다. 존재의 본질은 사물을 인식하고 의미를 통해서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 파악할 수 있지만, 이 두 시의 시적 화자는 사물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한다. 이 두 시에서 '위험한'의 의미는 바로 서로가 존재의 본질을 통해 의미를 만들고,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미지의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치환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이상 세계를 갈구하는 존재'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고 이를 '깃발'로 형상화했다. 박남수의 '새'의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그 순수를 겨냥하지만,/매양 쏘는 것은/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도 관련시켜 해석해 볼 만하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존재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실패한 미지의 어둠 상태이다.]
시간이 똘똘
배암('뱀'의 사투리)의 또아리(똬리. 짐을 일 때 머리 위에 얹어서 짐을 괴는 고리 모양의 물건. 여기서는 뱀이 몸을 틀고 있는 모양을 말한다.)를 틀고 있다.[위험한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줌. 화자와 오렌지가 서로를 몰라 당혹해하고 절망하는 시간이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화자와 오렌지 사이의 긴장이 오랜 시간 동안 계속 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절망감
그러나 다음 순간(절망의 어느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누구인지는 몰라도 갈망하는 문제의 해답을 제공해 줄 것 같은 희망적 예감을 주는 절대적 존재를 의미한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막연한 존재이기에 '그림자'라고 표현하였다.)가 비치고 있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아직은 예감일 뿐임. '그림자'의 속성과 관련됨. 내가 존재의 본질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자'는 아직 완전한 실체가 없는 막연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본질을 어쩌면 알 수 있을 것도 같은 가능성을 나타낸 부분이다. 그러나 아직은 막연하기 때문에 그림자로 비유되고 있다.] - 미약하지만 본질 파악의 가능성에 대한 예감
그러나 다음 순간, - 아직 몰라도. : 절망의 어느 순간, 어쩌면 사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은, 잘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가 보이는 듯한 희망적인 예감의 느낌을 나타낸 부분이다. 그러나 아직은 스쳐 가는 예감일 뿐 사물의 본질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존재론과 인식론
존재론 |
대상 모두를 일단 존재자로 칭하고, 그 존재자에 관한 근원적인 탐문을 수행하며 존재 세계에 대한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이해에 다가서고자 하며, 형이상학을 구축하는 철학적 세계관 |
인식론 |
지식 일반에 관한 반성적 탐문의 과제로 진리와 인식의 기원, 의미, 범위, 기준, 조건 등을 문제 삼는 철학의 연구 영역 |
예를 들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지 않으면 보배로서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슬로서 가치가 없다"는 입장이 '인식론'적 입장이라고 하면('아무도 오렌지에 손 댈 수가 없다), "꿰지는 않았어도 구슬은 구슬이다"는 입장(오렌지는 오렌지다)이 '존재론'의 입장이다.
이해와 감상
'오렌지'라는 한 사물을 소재로 하여, 존재론적 관점에서 사물의 본질적 의미를 추구한 주지주의 계열의 작품이다. 사물의 겉(일상적)과 속(본질)의 의미를 대조시켜 한 존재의 참다운 본질 파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 6연으로 된 일종의 주지시이다. 제 1연에서는 오렌지라는 의미 이전의 사물 그 자체로서의 오렌지가 묘사된다. 제2,3연은 '나'가 인식하는 단순한 외형적 사물로서의 오렌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렌지의 껍질을 벗길 수도 속살을 깔 수도 있다. 제4,5연은 존재의 본질로서의 오렌지이다. '나'가 그를 파악했다고 느끼는 순간, 오렌지는 '손을 댈 수 없는' 주체적 존재로 마주한다. 그러므로 '나'와 오렌지는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상대적 존재로 대립해 있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 제 6연은 오렌지와 '나'의 긴장이 계속된 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진 그림자'의 존재를 막연히 감지함으로써 긴장 해소의 예감을 느낀다.
김춘수의 '꽃'이나 '꽃을 위한 서시'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전자는 '꽃'을 소재로 하여 인간과 사물의 관계 맺음에 대한 인식론적 깨달음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비해, 이 시는 '오렌지'를 대상으로 하여 그와 같은 내용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시에서 '오렌지'는 인간과 맞서 있는 대상 세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인간이 오렌지의 껍질을 벗기거나 아니면 '찹잘한 속살'을 까는 순간 오렌지는 사라지고 만다. 왜냐하면 오렌지는 '껍질'이나 '속살'로 분해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 오렌지를 파악하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오렌지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고 부정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와 대상 세계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소 막연하기는 하지만 바로 그와 같은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오렌지'를 소재로 하여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하나 진정한 존재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관념적이고 주지적인 성격의 시이다.
이 시에서 '오렌지'에 손을 대는 것은 존재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행위이다. 시적 화자가 오렌지에 손을 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뜻하는 것으로, '오렌지'의 '껍질'과 '속살'과 같은 외면에는 다가갈 수 있어도 사물의 진정한 본질인 내면에는 이르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오렌지'를 아무리 정의하고 분석해도 그 순간 '오렌지'는 그 정의와 무관한 본질적인 존재로 돌아가서 '나'와 대치하게 된다. '오렌지'와 '나'는 서로 주체이며 객체이다. 서로의 본질을 통해 의미를 만들고 관계를 만들어 내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 서로를 알지 못하는 미지(未知)의 상태에서 느끼는 절망감으로 '나'와 '오렌지'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나'는 오렌지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한 가닥 희망을 발견하면서 이 시는 끝을 맺지만, 내가 느끼는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그림자'와 같이 막연한 존재이다.
이해와 감상2
전 6연으로 된 주지시이다. 제 1연에서는 오렌지라는 의미 이전의 사물 그 자체로서의 오렌지가 묘사된다. 제 2∼3연은 '나'가 인식하는 단순한 외형적 사물로서의 오렌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렌지의 껍질을 벗길 수도 속살을 깔 수도 있다. 제 4∼5연은 존재의 본질로서의 오렌지이다. '나'가 그를 파악했다고 느끼는 순간, 오렌지는 '손을 댈 수 없는' 주체적 존재로 마주한다. 그러므로 '나'와 오렌지는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상대적 존재로 대립해 있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 제 6연은 오렌지와 '나'의 긴장이 계속된 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진 그림자'의 존재를 막연히 감지함으로써 긴장 해소의 예감을 느낀다.
이 시는 존재의 본질 자체에 대한 물음을 오렌지라는 소재를 통해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혹은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회의에서 시작되고 있으며, 그 회의을 깨끗이 없애지 못했지만 '한없이 어진 그림자' 같은 구원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데서 끝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물에 관심을 둘 때는 그것의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벗길 수 있는 때, 즉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때인데, 그러나 거기서 나아가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려 할 때는 존재의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
존재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회의로 시작된 이 작품은 한 가닥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사물의 생명 본질에 닿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시이다.
이해와 감상3
신동집의 시 '오렌지'가 어렵다는 님께
선생님의 글을 읽고 보니 자료들을 만들 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있기는 있군요. 시가 어렵기는 하지요. 시인들의 온갖 고뇌와 철학이 담긴 짧은 시어들을 올바르게 해석한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지요.
그런데 저도 한때 선생님처럼 고민을 한 적이 있었고, 지금도 고민을 하고 있는데 요즈음은 시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편하게 생각을 한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알려진 시인들 모두가 좋은 시를 쓰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 시 모두를 의미 부여를 하고 고민하면서 해석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쓸모 없는 그런 시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인들의 일상의 삶을 알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문학 수업을 통해서 시인들의 좋은 시를 해석하면서 감탄을 할 때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 부담스러운 시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가급적이면 '알려진, 이름 있는 이들'의 시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점을 헤아려 시 감상을 시도한다면 별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시 해석에는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가 있거든요. 물론 그러한 다양한 관점과 시 해석이 논리적인 타당성을 결여할 때는 문제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일 포스티노'의 영화의 한 장면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난 내가 쓴 글 이외의 말로 그 시를 표현하지는 못하네. 시란 설명하면 진부해지고 말지. 시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직접 경험해 보는 것뿐이야"
모든 것을 다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말고 그냥 느껴야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처럼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 느낌을 논리화시키고 알기 쉽게 풀어서 가르쳐야 하는 사명이 우리의 머리를 짓누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 '신동집'의 '오렌지'에 이른 말을 하고 나니 조금 부담스럽지만, 너무 '알려진 시인'에 대한 후광(後光)에 우리가 너무 눈부셔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존재는 얼마나 오묘한 존재입니까? 간단한 예로 '북극점'을 향해서 목숨을 건 항해를 하는 것이나, 또는 눈덮인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죽음도 마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우주'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탐사선을 계속 쏘아대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인간이 존재하는 한 존재의 본질을 추구하는 몸짓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런 몸짓은 시로 나타날 것이고, 과학자는 '과학적 진리'의 탐구로 나타날 것입니다. 특히 '시'를 '존재'의 탐구의 한 방법으로 볼 때 그 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 법한 일입니까?
심화 자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김춘수의 꽃은 사물로서의 '꽃'에 대한 이름과 그 의미에 대한 관계의 고찰을 바탕으로 존재의 본질에 대해 시적 의미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즉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고 있는 작품으로,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의미 없는 것에서 상호 인식을 통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또 '꽃을 위한 서시'에서 `꽃'은 사물에 내재해 있는 본질 혹은 본질적 의미로 해석된다. `나'는 그것에 접근하여 해명하고자 하는 인식 주체이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욕구와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본질은 밝혀지지 않는다. 그가 사물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꽃)을 포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다. 사물의 본질은 언제나 완전한 인식의 가능성 저편에 있으며, 마치 영원히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와 같다. 이것이 대체로 정리해 본 이 시의 철학적 의미이다. 제3, 4연은 이와 같은 좌절로 인한 슬픔과 비극적 의식을 노래한 것이다. 특히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란 구절은 사물의 본질적인 의미. 그 본질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음을 말하고, 따라서 존재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나'의 노력은 끝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철학 술어로는 불가지론(不可知論, 참다운 실체는 결코 인식될 수 없다는 학설)이라 부르는 이 생각을 시인은 꽃이라는 사물을 초점으로 하여 표현했다. 그런 뜻에서 이 작품을 철학적, 사색적 이미지의 시라 할 수 있다.
유치환의 '깃발'은 이상적 세계에 대한 동경과, 그것에 도달할 수 없는 한계로 인한 근원적 비애를 드러낸 시이다. 사물로서의 깃발은 바람에 끝없이 펄럭이지만 깃대에 매어 있는 동안은 날아갈 수 없다. 또 깃대에서 벗어난다면 단지 조금 날아가다 땅에 떨어지는 천 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처럼 이 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그 곳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좌절과 한계의 마음을 상징한다. 어차피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허무의 세계를 끝없이 갈구하는 인간의 운명과 본질에 대한 연민과 애수가 바로 인간 존재의 아이러니를 표상한다.
이로 보아 이 두 시에서 '꽃'과 '깃발'은 사전적 의미를 가진 실제의 사물이라기보다는 시인의 관념적인 생각을 나타내기 위한 일종의 상징적 이미지라고 볼 수 있다. 즉 '오렌지'와 마찬가지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사용된 철학적 소재인 것이다.(참조 : 홍신선 박종성 김강태 공저 천재교육 문학 지도서)
신동집(申瞳集 1924 - 2003)
시인. 본명은 동집(東集). 호는 현당(玄堂). 초기에는 휴머니즘의 옹호와 주지시 경향의 시를, 중기 이후에는 인생론적 존재를 탐구하는 시를 썼으며 서구적인 감각과 동양적인 예지와 조화를 추구하는 시를 남겼는데, 대상을 즉물적(卽物的)으로 그리면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시집으로 <대낮>, <서정의 유형(流刑)>, <제2의 서시(序詩)>, <모순의 물>, <들끓는 모음(母音)>, <빈 콜라병>, <새벽녘의 사람>, <송신(送信)>, <세 사람의 바다>, <암호> 등이 있다.
주지주의(主知主義) / intellectualism)
인간의 마음은 지(知)·정(情)·의(意)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서 지성·이성·오성(悟性)과 같은 지적인 기능을 다른 감정이나 의지의 기능보다도 상위에 두는 견해. 감정을 상위에 두는 주정주의(主情主義;정서주의)나, 의지(意志)를 상위에 두는 주의주의(主意主義)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중세 스콜라철학에서는 지성과 의지의 관계가 문제되어, 지성의 우위를 주장한 T. 아퀴나스가 대표적인 주지주의자였다. 이러한 경향은 거슬러올라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그리스철학에서, 그 이후에는 B. 스피노자나 G.W.F. 헤겔의 범논리주의(汎論理主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인식이 감관(感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성에 의해 생긴다고 보는 합리론도 넓은뜻에서의 주지주의에 속한다. 윤리학에서는 감정을 제거하고 냉정한 지적 통찰과 숙려(熟慮)에 바탕을 두고 의지를 규정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주지주의적인 입장인데 이것은 감정이나 의지의 움직임 등을 중시하는 비합리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출처 : 파스칼대백과사전)
넓은 의미로는 교회의 권위 또는 봉건성에 반항, 과학이나 합리성을 중시하고 널리 근대화를 지향하는 것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기계문명과 도회적 감각을 중시하여 현대풍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예술상에서의 모더니즘은 20세기 초, 특히 1920년대에 일어난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형식주의(포멀리즘) 등의 감각적 ·추상적 ·초현실적인 경향의 여러 운동을 가리켜 말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와 같은 여러 운동을 통틀어 모던 아트(modern art)라고 말하는 경향이 많으나, 이것을 대국적인 견지에서 말한다면 19세기 예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주의(리얼리즘)에 대한 반항운동이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전위예술(前衛藝術: 아방가르드) 운동의 한 형태였다.
한국 문학에서는 1931년경 프로문학의 퇴장과 일제강점기 군국주의의 대두를 계기로 나타났으며, 일명 주지주의라고 일컬었다. 김기림(金起林)이 시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배격하고 시작(詩作) 자체의 의식성을 강조하는 시의 기술주의(技術主義)를 주장하면서 형태화하였다. 김기림은 모더니즘 시운동을 벌였으며, 그 특징은
① 정서적 우세에서 지성적 우세로,
② 현실에 대한 초월적 태도에 대하여 비판적 적극성을,
③ 청각적 요소에 대하여 시각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소설에서는 1934년 최재서(崔載瑞)가 주지주의 문학을 소개하고, 실제로 이상(李箱)의 작품을 중심으로 심리주의적 경향을 비평하면서 전개되었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적 문인들로는 프랑스의 P.발레리, 영국의 T.E.흄, T.S.엘리엇, H.리드, 헉슬리 등의 이론과 작품의 영향을 받은 정지용(鄭芝溶)·김광균(金光均)·장만영(張萬榮)·장서언(張瑞彦)·최재서(崔載瑞)·이양하(李敭河) 등이 있다. 김기림의 장시 《기상도(氣象圖)》(1936)는 엘리엇의 《황무지》의 영향을 받은 당시 모더니즘의 대표작이며, 김광섭(金珖燮)·김현승(金顯承) 등의 시인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어 1950년대의 김수영(金洙映)·박인환(朴寅煥)·김경린(金璟麟) 등과 ‘후반기’ 동인들에 의해 모더니즘 시운동이 전개되었다. 1960년대의 ‘현대시’ ‘신춘시’ 동인들은 1930년대의 모더니즘시가 상실했던 상징적 내면의식과 초월의식을 형상화하려 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인식과정에서 감정이 아닌 이성을 진리의 원천으로 보는 경향 또는 태도로 주지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쓴 철학자는 F. 베이컨이다. 그는 과학의 진보를 방해하는 잘못된 사상을 가리키는 경멸적 의미로 주지주의를 사용했다. 또한 I. 칸트는 주지주의를 감각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감각은 가상만을 알 수 있고 오성이 진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칸트는 플라톤과 G. B. 라이프니츠를 가장 뛰어난 주지주의 철학자로 꼽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주지주의는 주의주의(主意主義)와 반대되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문학에서 주지주의는 모더니즘의 하위개념으로서, 감정이나 정서를 중시하는 주정주의(主情主義)와 대립된다. 여기서 주지(主知)라는 말은 작품세계가 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지적이라는 뜻이다. 이는 대상을 형태 또는 물리적인 것으로 파악하며 그결과 추상론을 띠게 된다. 대표적인 주지주의 문학론은 T. E. 흄의 불연속적 세계관에 입각한 신고전주의이다. 흄은 막연하고 신비스러운 낭만주의 시를 거부하고 확실하고 건조한 고전주의 시를 옹호했는데, 그것은 반(反)휴머니즘적인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E. 파운드에 의해 이미지즘 운동으로 발전되었으며, 나아가 T. S. 엘리엇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파운드가 명확한 이미지의 제시를 통한 즉물시를 주장했다면, 엘리엇은 객관적 상관물에 의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그러나 엘리엇의 주장은 P. 발레리의 기하학적 사고나 A. L. 헉슬리의 풍자정신과 구별되고 사회비평 또는 문명비평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한국문단에서 주지주의는 1930년대에 이르러 김기림·이양하·최재서 등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이들이 정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점은 주지주의의 도입과 관계가 깊다. 김기림과 이양하는 시론을, 최재서는 비평론을 소개했으며, 이들이 주로 소개한 주지주의 문학론자들은 흄, 엘리엇, I. A. 리처즈 등이다. 특히 최재서는 흄과 엘리엇에게서 과학적 인생관, 신고전주의 및 주지주의(기하학적인 것의 부흥과 낭만주의의 배격)의 방법론을 배웠다. 주지주의가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 김기림에 의해 시작되어 지금까지 모더니즘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주지주의는 모더니즘의 하위개념으로 구별해서 사용해야 한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