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 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요점 정리 지은이 : 한하운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기구적, 서정적, 감상적, 민요적, 애상적 제재 : 파랑새 구성 : 단순한 구조와 반복적 표현을 통해 시적 화자의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연 - 자유로운 삶의 기원 2연 - 자유로운 삶의 세계(이상향) 3연 - 자유로운 삶의 내용 4연 - 자유로운 삶의 기원 주제 : 자유로운 삶에 대한 소망 출전 : <보리피리>(1955)
내용 연구 나는 나는(반복을 통한 염원의 간절함을 드러냄) 죽어서 파랑새가 되어(자유로운 삶에 대한 부러움 → 현재 그렇지 못한 상황을 말하고 작가는 실제로 나환자 수용소에 있었음, 죽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어 자신의 처지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고, 파랑새는 천형의 업보에서 벗어난 희망과 자유로움) - 죽음을 통해서라도 얻고자 하는 자유로움 푸른 하늘(푸른은 파랑새와 색채감이 연결되고, 파랑새가 지닌 푸른 색채 이미지는 이 시 전체를 지배하는 주된 이미지로, '순수, 자유, 희망, 드넓음, 해방' 등의 원형 이미지로 차용되었는데, 마지막 연에 다시 반복되어 수미쌍관을 이룸으로써 자유로운 존재에 대한 화자의 갈망을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푸른 들(자유로운 세계를 상징하는 '푸른 하늘', '푸른 들'은 화자가 처해 있는 나병 환자라는 현실과 대조되는 세계로 그에 대해 동경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날아다니며(자유로운 삶의 구체적 모습으로, 박남수의 시 '종소리'의 '나는 바람을 타고 들에서는 푸름이 된다'는 의미와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 소망하는 삶 푸른 노래(푸른 색은 슬픔과 한이 서린 색으로 청각의 시각화 - 공감각적 심상) 푸른 울음(여기서 푸른빛은 어딘가 슬픔이 깃들인 빛깔이다. 그래서 푸른빛은 사실 시적 화자의 현실적 슬픔, 한이 담겨 있다. 푸른 울음은 궁극적으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이 담긴 울음으로 시적 화자의 현실적 처지를 담고 있다. 현재의 한이 너무 크고 깊기에 새가 된 뒤에도 푸른 노래와 푸른 울음을 울 수밖에 없다. 사실 그 당시 나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불치로 인식된 병에 대한 시적 화자의 인식은 결국 푸른빛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울어 예으리(울며 살리라) - 소망하는 삶의 내용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리(간절하고 절실한 소망을 수미 상관의 구성으로 기원을 극대화하고 있다) - 자유로운 삶에 대한 희구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구조와 내용이 단순하며, 초점이 명확하다. '나'는 죽은 뒤에 왜 파랑새가 되리라고 하는가? 그 자유로운 삶이 부럽기 때문이다. 이 점으로 보아 '나'는 지금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작품은 아마도 한하운이 나환자 수용소에 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 듯하다. 그렇기에 그는 푸른 하늘과 들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삶을 갈망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는 '파랑새'가 되겠다고 하며, 더욱이 '푸른 노래 / 푸른 울음'을 울겠다고 하는가? 이 점은 푸른 빛의 색채 감각으로 이해해야 한다. 푸른 빛이란 어딘가 슬픔이 깃든 빛깔이다. (어떤 심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우울한 사람들이 푸른 빛을 좋아하는 비율이 높다고도 한다.) 따라서 '푸른 노래 / 푸른 울음'이란 그가 지닌 슬픔, 한이 서린 노래와 울음이다. 현재의 삶이 너무도 부자유스럽기에 그는 이 삶이 다한 뒤에 새가 되고 싶어 하지만, 지금의 슬픔과 한이 너무도 깊기에 새가 되어서도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울겠다고 하는 것이다. 단순한 구도와 적은 어휘를 써서 뼈저린 슬픔을 극히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절실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이해와 감상1 시인 한하운은 그의 '나의 슬픈 반생기'라는 글에서 고향 땅에 돌아 왔으나, 이 꼴로 집에 돌아갈 수가 없다. 더욱이 동리 사람의 눈이 무서워서 도저히 밝은 낮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진종일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사람이 안 다니는 들에서 종일 굶으며 기다려야 했다. 이제는 정말로 문둥이가 된 설움이 가슴을 찢는다. 문둥이 생활로 입학하는 분함과 서러움에 하루 종일 잔디에서 울었다.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내 값이 정말로 한 푼어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이제는 인간 폐업령이 내려졌다. 나는 원한의 피를 토하며 통곡하였다. 몇백 번 고쳐 죽어도 자욱자욱 피맺힌 서러움과 뉘우침이 가득 찬 문둥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밤이 어두워진다. 모든 것을 검게 가리어 주는 밤이 온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자유와 이상과 동경을 상징하는 노래로 '파랑새'라는 시를 읊으며 인간의 행복을 빌었다. 당신이 사회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같이 있기를 꺼려하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돌아다니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세상에서 시인에게 '자유'는 얼마나 소중할 것인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에게 시적 화자는 '자유'를 보았고, 그는 현실적 비참함에 대한 위로를 시릍 통해서 얻고자 했는 지 모른다. '자유'라는 의미를 안다면 당신은 이 시를 이해하게 될 것이리라. 정말로 현실적으로 받는 고통을 어찌 우리가 관념적으로 이해하겠는가? 그러나 나병 환자 한하운은 시로 그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어쩌면 문학이 유일한 벗이었는지 모른다.
심화 자료 한하운(韓何雲) 1919∼1975. 시인.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 출신. 종규(鍾奎)의 아들이다. 1932년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 1937년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동경 세이케이고등학교(成蹊高等學校) 2년을 수료하였다. 그 해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1943년 북경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1944년부터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근무하였으나 1945년 한센씨병(나병)의 악화로 관직을 사퇴하고 서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함흥 학생데모사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바도 있다. 그 뒤 치료비로 가산을 탕진하고 1948년 월남, 유랑의 생활을 하였다. 그 뒤 자신의 투병 생활과 함께 1950년 성혜원(成蹊園), 1952년 신명보육원(新明保育院) 등을 설립, 운영하였고, 1953년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뒤 1966년에는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는 한편, 무하문화사(無何文化社)라는 출판사도 경영한 바 있다. 그의 창작 활동은 학창시절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문단 활동은, 1949년 이병철(李秉哲)의 소개로 ≪신천지 新天地≫ 4월호에 〈전라도길〉 외에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같은 해에 첫 시집 ≪한하운시초≫를, 1955년에는 제2시집 ≪보리피리≫를, 1956년에는 ≪한하운시전집≫을 펴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시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특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적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온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시적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유해는 경기도 김포군 장릉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저서 외에,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1957), 자작시해설집 ≪황톳길≫(1960), ≪정본(定本)한하운시집≫(1966) 등이 있다. ≪참고문헌≫ 나의 슬픈 半生記(韓何雲, 人間社, 1957), 韓何雲詩鑑賞(朴巨影 解說, 人間社, 1959), 韓國現代文學史探訪(金容誠, 玄岩社, 198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 한하운(韓何雲)의 시집. 변형 A5판. 70면. 1949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하였다. 작자의 첫 시집으로 〈전라도길〉·〈손가락 한마디〉·〈벌〉·〈목숨〉·〈삶〉 등 25편의 시와, 그를 시단에 소개한 이병철(李秉哲)의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이 나올 때 한하운은 방랑생활 중인 나병환자였다. 따라서, 이 시집과 그 뒤에 발표된 그의 모든 시에는 나병환자라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그에 따른 처절한 체험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 체험은 그 자체가 특이한 것이기에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하운은 감상을 자제하고 그것을 객관화함으로써 표현 효과를 더욱 높이고 있다. ‘소록도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전라도길〉에는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이 시의 제5연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는 대목은 제6연의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과 더불어 화자의 나병이 절망적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는 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하는 객관성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객관성은 화자의 비통한 체험에 대한 상상적 추체험(想像的追體驗)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에는 또 처참하게 버림받은 자의 애절한 꿈을 민요적 가락으로 읊은 시도 수록되어 있다. 〈파랑새〉라는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소월시(素月詩)의 민요적 기풍을 방불하게 하는 이러한 경향은 제2시집 ≪보리피리≫에 수록되어 있는 〈보리피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시집은 한국 신문학사에 등장한 최초의 나환자 시집으로서, 특이한 체험을 객관적인 어조로 혹은 민요적 가락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참고문헌≫ 나의 슬픈 半生記(韓何雲, 人間社, 1957), 韓何雲詩鑑賞(朴巨影 解說, 人間社, 1959), 韓何雲의 文學과 生涯(金允植, 새빛, 1975.3.).(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골적(人骨笛)
아득히 아득히 몇 억겁을 두고 두고 울고 온 소리냐, 인골적 소리냐 엉 엉 못살고 죽은 생령(生靈)이 운다 아 천한(千恨) 절통의 울음이 운다 몽고라 하늘 끝 아시아의 북벽(北僻) 유수(幽愁)와 사막의 맛서는 통고사(通古斯) 죽음의 밤에 라마승은 오늘밤도 금색묘당(金色廟堂)에 신에 접한다고 인골적을 불며 상형문자 같은 주부(呪符)의 경전을 회색에 낡은 때묻은 얼굴로 악마를 중얼거린다 라마는 몽고의 신 천상천하 다시 또 없는 제왕의 제왕 이 절대자는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도 심지어 나어린 처녀의 첫날밤 마수걸이도 교권의 절대 앞에 지상에도 천국에도 없는 오, 오소리티여 신성과 은총과 구원이 인골적 울음없이는 금와무결(金와無缺)이 있을 수 없다고 선남선녀의 부정(不淨)없는 생령을 생사람 산채로 죽여 제물로 도색(桃色)이 풍기는 뼈다귀를 골라 피리감으로 다듬어 다듬어서 구멍 뚫어서 피리로 분다 강동이라 인골적 몽고의 오소리티여 인골의 피리 가락은 낮이나 밤이나 삭북(朔北)의 유수(幽愁)와 몽매한 암흑에 교권 정치의 우미(愚迷)한 고집의 절대 앞에 생과 환희를 모르는 채 영영 쓰러진 사랑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시혼(屍魂)이 사막의 풍우로 버려진 풍장(風葬)의 시혼이 사막에 떠돌아 위령(慰靈)없는 처절한 원차(怨嗟)로 그 몹쓸 자. 바이칼 살풍(殺風)에 산산히 부서진 사령(死靈)이 단장(斷腸) 터지는 곡소리가, 무수한 곡소리가 한가닥 인골의 피리에 맺혀 우는 호원(呼寃) 천한절통(千恨切痛)의 울음으로 흐흐 느낀다 교권의 독성의 자행과 착취 그 악순환은 옥토 몽고 대평원을 고비 사막으로 황폐시킨다 성길사한(成吉思汗) 세계정패(世界征覇)의 대제국이 암흑으로 성병으로 완전히 멸망으로 잠겨 버렸다 천지 창조의 신은 한 떨기 꽃에 한 마리 새에 한 가람 강물에 평화와 행복의 계시와 은총을 주셨으니 신을 매복(賣卜)한 라마의 악의 업보(業報)는 천지 창조의 신의 분노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삼라만상의 태반인 산천마저 사막으로 한 떨기 꽃도 피어날 가지 없이 한 마리 새도 쉴 나무 숲도 없이 별이 쉬어 갈 샘물도 없이 천애(天涯) 지애(地涯) 평사만리(平砂萬里)로 황폐시켰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유린한 채 나라를 망해 먹고 민족마저 망해 먹었다 라마승은 제트기 날아가는 원자(原子)의 이 찰나에도 사랑의 뼈다귀 인골의 피리를 불며 악마의 경전을 중얼거리며 아직도 절대지상(絶對至上)이라는 교권으로 생살여탈권 나어린 처녀의 첫날밤 마수걸이를 오, 오소리티여 인골의 피리는 엉 엉 못살고 죽은 선남 선녀의 생령이 한 떨기 꽃을 한 마리 새를 한 가람 강물을 찾으며 운다 인골적 인연(人煙)이 끝인 황사만리(荒砂萬里) 절역(絶域)에 엉 엉 천한절통의 울음으로 흐흐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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