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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방/★좋은시★

2012년 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by 미스커피 2012. 1. 11.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련사 K / 한명원   그는 입안에 송곳니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두 발로 걷는 것이 불편할 때도 있어 혼자 있을 때 네 발로 걸어도 보았다. 야생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조련은 가늘고 긴 권력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손으로 옮겨갈 때 가벼워진다. 눈치를 보는 것들의 눈빛은 언제나 심장을 겨냥하는 법. 다만 두려운 것은 손에 들려 있는 권력일 뿐이니까.  조련사 k. 그는 아침마다 동물원을 한 바퀴씩 도는 순방이 있다. 금빛 은행잎이 k의 머리 위로 왕관처럼 씌워진다. 철조망에 갇힌 초원이 펼쳐져 있다. k는 손을 흔들거나 휘파람을 분다. 잠자던 맹수가 눈을 뜨더니 달려온다. 무릎을 꿇는다.  k는 맹수의 꼬리를 목에 두르고 맹수코트를 걸치고 곤봉을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어느 날부터인가 k의 얼굴에 구레나룻이 생기고 몸에 털이 자라고 손톱은 길어졌다. 모든 모의謀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긴다. 말 안 듣는 맹수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채찍을 휘두르며 맹수보다 더 맹수처럼 사나워져갔다.  얼마 전 야생의 모의謀議가 철조망을 빠져나갔다. 그 후 k의 통장으로 감봉된 월급이 들어왔다. k는 자기 목을 조르는 조련사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몸에 털이 빠지고 손톱이 빠졌다.  조련으로 청춘을 보낸 k는 결국, 야생을 놓치고 말았다.

 

  새로운 조련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맹수들과 더 빨리 친해졌다. 동경하던 야생은 저 쪽에서 어슬렁거렸다. 이빨 빠진 맹수 한 마리가 다른 맹수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렸고 금빛 왕관은 가을 저 쪽으로 다 날아가 버렸다. 얼마간 퇴직금의 조련을 받는 힘없는 맹수가 되어 있었다

[심사평] 치밀한 관찰과 묘사… 섬뜩한 시적 투시력 보여  본심에 올라온 8명 응모자들의 작품을 읽고 선자들은 갈수록 장황해지고 난삽하고, 모호해지는 오늘날의 시의 흐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시 본연의 길을 추구하는 시로서 시의 고전적 규범이라 할 언어의 함축미와 새롭게 삶을 성찰하고 투시하는 상상력의 결핍이 심화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했다. 논의를 거듭하며 검토한 결과 최종적으로 3명의 작품이 남게 되었다.  먼저 ‘창밖이 푸른곳’등 3편을 투고한 김은지의 경우 ‘뿔의 냄새’가 눈길을 끌었지만 아쉽게도 이미 과거에 응모했던 동일 시를 계속 투고하고 있다는 점이 신인으로서의 자세가 아니라는 점과 다른 두 편의 시적 사유도 평면적이란 점이 못내 아쉬웠다.  '조련사k’ 등 3편의 작품을 투고한 한명원의 경우 산문적 진술을 꾀하며 그 안에 극적 구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거슬리지만 삶의 구체성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묘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시는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되돌아보게 해준다. 그러나 시적 발상이나 화법이 새롭다기보다는 유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번 응모자 중에서 인간과 현실에서 삶의 남루함을 포착하는 섬뜩한 시적 투시력을 보여준 유일한 작품이란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불통을 어루만지다’외 3편을 투고한 정지우의 경우 시적 표현은 응모 시 중에서 가장 세련되어 보였지만 ‘뒷문의 형식’이나 ‘사춘기’와 같이 시를 거의 관념에서 끌어오고 있다는 점이 아무래도 불안해 보였다.  두 선자는 당선작을 최종적으로 가리는 과정에서 유형화된 시적 틀에 갇힌 시라는 다소의 불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삶을 관찰하는 한명원의 ‘조련사k’가 보여준 힘없는 맹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단단한 말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합의했다. 시라는 것은 삶과 현실에 대한 성찰과 열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문정희·조정권 시인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월면 채굴기 / 류성훈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심사평

 

"입체적인 상상력에 눈길, 수사의 과잉은 아쉬워"

시 부문 심사는 예심 없이 심사위원들이 투고작을 나누어 읽고 추천된 작품을 교환해서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춘문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보다는 서정적 화법으로 일상적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이 잘 발견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정형화된 감정과 관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 익숙한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 된 작품은 '그늘말'(박하랑)과 '연애의 국경'(여성민), '월면채굴기'(류성훈)였다. '그늘말'은 투명한 감수성과 정갈한 언어들이 돋보이는 시였다. 생에 대한 따뜻한 태도와 언어에 대한 맑은 감각이 좋았지만, 함께 투고된 작품들을 고려할 때, 세계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이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연애의 국경'의 경우는 발랄하고 독특한 화법이 매력적인 시였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연애'와 '국경'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언어와 형식상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우려를 떨치기 힘들었다.

 

  당선작이 된 '월면채굴기'는 우선 그 상상력이 입체적이고 화려하다. 아버지의 병과 생의 이야기를 아버지 몸속의 돌과 두개골과 달 뒤편 돌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매혹적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며 아버지의 병과 생애를 둘러싼 깊은 시선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다만 수사의 과잉이 있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구축에 치중하는 작법이 어법 자체의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앞으로 쓰게 될 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극복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 쓰는 일이 외로움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에, 투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황지우(시인) 정일근(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201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풍경 재봉사 / 김민철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

 

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심사평

유행·시류 벗어난 우아한 아름다움 돋보여

  예심을 거친 20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이해존의 ‘안락한 변화’, 유정용의 ‘IN 1914 네루다’, 안대근의 ‘샌드위치 인생’, 김민철의 ‘풍경 재봉사’ 등 4편이었다.

 

  ‘안락한 변화’와 ‘IN 1914 네루다’는 사실성이 두드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 전체가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점에서 먼저 탈락되었다.

 

  정말 좋은 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나친 모호성이 해석의 다양한 물꼬를 막았다.

‘샌드위치 인생’은 ‘벽돌의 무게를 짊어지는 사람의 등은 벽돌보다 벌겋지’라는 첫 행에서부터 개성적 면모가 두드러졌으나 결국 희망이 상실된 어두운 심상으로 시가 종결되고 말았다는 점이 단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제목을 정하는 능력이 약했다. 제목도 시의 일부이므로 시 전체를 관류할 수 있는 제목이 요구되나 그렇지 못했다.

더군다나 같은 시를 제목만 바꾸어 중복 투고해 성실성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풍경 재봉사’는 신선하고 아름답다. 유행과 시류에서 벗어난 점이 무엇보다 장점이다.

 

 201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물푸레 동면기 / 이여원(李如苑)

  물푸레나무 찰랑거리듯 비스듬히 서 있다

  양손에 실타래를 감고 다시 물소리로 풀고 있다

  얼음 언 물에 들어 겨울을 나는 물푸레

  생각에 잠긴 척

  바위 밑 씨앗들이 졸졸 여물어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얼룩무늬 수피가 물에 닿으면 물은 파랗게 불을 켰었다 바람은 지나가는 분량이어서 몸 안에 들인 적 없고 팔목을 좌우로 흔들어 멀리 쫓아 보냈었다

  손마디가 뭉툭한 나무는 실을 푸느라 팔이 아프다

  나무의 생채기에 서표(書標)를 꽂아두고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꽂아두고 말린다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

  추위가 가득 엉켜 있는 물가, 작은 샛길이 마을 쪽으로 얼어 미끄럽다

  빈 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들

  모두 봄이 오는 방향 쪽으로 비스듬 마중을 나가 있다

  날짜를 세는 가지는 문맹(文盲)이다

  개울이 키우고 있는 것이 물푸레인지 물푸레가 키우고 있는 것이 개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뭇잎 하나 얼음 위로 소금쟁이처럼 떠 있다

시 심사평 치밀한 묘사력·견인주의적 시각 돋보

심사위원 도광의  박형준    대개 오늘날의 새로운 경향의 시는 상관관계가 멀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조합이나 산문적인 형식의 실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인간의 감성을 새롭게 드러낸다고 하여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전적으로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은 꽃의 개화(開花)도 후에 관찰해보면 어떤 법칙이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읽히지 않는 시라고 하여 다 난해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 까닭에 시가 난해하기는 해도 어불성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사물들에서 상관관계를 보는 참신한 시각과 그에 따른 보편성의 획득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신춘문예는 참신성과 패기가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해나가는 신인들의 미래 문법이 각축을 벌이는 축제의 장이다.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 중에서 최종심에서 논의된 것은 이재흔의 '크라이오닉스', 이해존의 '유목의 방', 이여원의 '물푸레 동면기'와 '난청' 등 4편이었다. '크라이오닉스'는 발상이 참신하지만 언어의 경제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실패한 은유들이 더러 눈에 띈다. '유목의 방'은 말미의 비약이 아쉽다. 이 시는 고시원이라는 막막한 삶의 공간을 대초원이라는 상상적 공간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러나 말미의 ‘고시원 휴게실’과 앞에서 펼쳐낸 ‘몽골 사내’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 좀 더 치밀하게 접근했어야 한다. 세상에 완벽한 시는 성립할 수 없다지만 불가능한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능력은 시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결국 이여원의 두 작품에서 하나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이견 없이 합의했다. '물푸레 동면기'는 얼음물에 떠 있는 겨울의 물푸레나무를 치밀하게 묘사해가면서 서정시의 깊은 완성도를 보였다. 또한 '난청'은 사물을 포착하는 감성이 신선하다. 그만큼 두 작품 모두 각각 완성도와 참신성이라는 양측면에서 잘 빚어냈다. 그의 두 작품 중에서 '물푸레 동면기'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것은 아포리즘의 도움 없이 세밀하고 실제적인 묘사만으로 새롭게 열어 보이는 서정의 창출이 읽을수록 착착 감기는 감칠맛과 더불어 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얼음물 속에서 동면하는 물푸레에서 견인주의적인 접근을 통해 “푸른 잎들은 물속 돌 밑에 들어 있고/ 겨울 동안 잎맥이 생길 것이다”라는 성숙한 견자의 시각을 이끌어내는 점도 인상적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서정의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한다.(도광의`박형준) 

 

예심: 송종규`장하빈

본심: 도광의`박형준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의 고아원 / 안미옥                                          

신발을 놓고 가는 곳. 맡겨진 날로부터 나는 계속 멀어진다.

쭈뼛거리는 게 병이라는 걸 알았다. 해가 바뀌어도 겨울은 지나가지 않고.

집마다 형제가 늘어났다. 손잡이를 돌릴 때 창문은 무섭게도 밖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벽을 밀면 골목이 좁아진다. 그렇게 모든 집을 합쳐서 길을 막으면.

푹푹, 빠지는 도랑을 가지고 싶었다. 빠지지 않는 발이 되고 싶었다.

마른 나무로 동굴을 만들고 손뼉으로 만든 붉은 얼굴들 여러 개의 발을 가진 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이상했다. 집을 나간 개가 너무 많고

그 할머니 집 벽에서는 축축한 냄새가 나. 상자가 많아서

상자 속에서 자고 있으면, 더 많은 상자를 쌓아 올렸다. 쏟아져 내릴 듯이 거울 앞에서

새파란 싹이 나는 감자를 도려냈다. 어깨가 아팠다.    

식탁에서 / 안미옥  내게는 얼마간의 압정이 필요하다. 벽지는 항상 흘러내리고 싶어 하고 점성이 다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 한다.

냉장고를 믿어서는 안 된다. 문을 닫는 손으로. 열리는 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옆집은 멀어질 수 없어서 옆집이 되었다. 벽을 밀고 들어가는 소란.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게

다리가 네 개여서 쉽게 흔들리는 식탁 위에서. 팔꿈치를 들고 밥을 먹는 얼굴들. 툭. 툭. 바둑을 놓듯

 

심사평

남다른 상상력 때묻지 않은 목소리

 

 장석남(왼쪽) 장석주 씨

 

  두 심사자가 예심에서 넘어온 16명의 시 80여 편을 각각 읽고 난 뒤 정지우의 ‘납작한 모자’, 김복희의 ‘매일 벌어지는 놀랄 만한 일’, 윤종욱의 ‘서툰 사람’, 김양태의 ‘흐르는 돌’, 종정순의 ‘알람들’, 조선수의 ‘분홍손’, 안미옥의 ‘나의 고아원’ 등을 당선작으로 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를 “어떤 것의 존재를 지우면서도 그것을 읽기 쉽게 유지하는 몸짓의 이름”이라고 했다. 시 쓰는 것도 낡은 존재를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존재를 세우려는 몸짓일 테다.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섞이고 스민다. 그렇게 상호 삼투하는 나날의 현존과 시적 현존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시적 현존을 세우는 데 상상력이라는 화학작용이 불가피하게 개입하는 까닭이다.

 

  두 심사자는 안미옥을 당선자로 세우는 데 흔쾌하게 동의했다. 다만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 하는 데는 의견 조율이 필요했다. 고심 끝에 두 작품 ‘나의 고아원’과 ‘식탁에서’를 골랐다.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눈이 비범하고, 현존의 혼돈을 뚫고 그 눈길이 가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이 우글거렸다. 남다른 상상력과 때 묻지 않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도 신춘문예라는 통과의례 이후의 작품들에 대한 신뢰를 크게 더하게 한다. 험난한 시업(詩業)의 길에 들어선 것을 축하드린다.

 

 

제7회 경제신춘문예 가작

 

정중한 각도 / 손호경

 

관솔 몇 점으로 술잔을 만든다그 잔에 향기를 가득 채우면 그가 나를 차지할 것이다

먼저 톱을 켜서 곁가지를 자른 다음 용각무늬가 새겨진 몸을 열어놓는다빗물로 몸을 닦고 바람으로 머리를 빗던 한 생이압축된 곡선을 고담하게 품고 있다

 

끌 머리를 토닥이며 흑반점 하나를 도려내자 메아리가 퍼렇게 울려 퍼진다그늘이 엷은 바람을 일으키자 그 몸에 우주를 그리듯 동그라미를 그려 넣고 숨을 멈춘 채 굳은 살점을 파들어간다

날 선 끌을 튕겨내다가 제 무늬를 가무리며 끌을 물고 늘어진다

어느 누가 제 몸을 호락호락 내어줄까정중한 각도로 손잡이를 고쳐 잡고 청정한 마음으로 살점을 들어낸다 구멍이 깊어질수록 관솔은 유순해지고 한 생애를 묵언으로 간직해온 감로정의 향기가 무늬의 간극 마다 흘러나온다

두 손 위로 올라앉은 술잔 울창한 솔밭 한 채가 그 안에 담겨있다 

심사평

  시부문은 아직 수준에 미달하는 출품작들이 많았다. 산문의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용이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렵게 4편을 최종심에 올렸다. <폐화분>과 <오리무중>그리고 수상작으로 결정된 <구두>와 <정중한 각도>가 그 작품들이다.

 

  <폐화분>은 골목에 버려진 화분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함께 출품한 작품들이 이에 따르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다음으로 <오리무중>은 "세상은 수심이 너무 깊어/발이 닿지 않았다"는 표현에서 보듯 시적 상상력이 뛰어났다. 다만 작품 후반이 전반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가작으로 뽑힌 <정중한 각도>는 함께 출품한 작품들이 골고루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 시적 훈련이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준다. 산문처럼 늘어지지 않는 시적 긴장도를 갖춘다면 더욱 좋은 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심사

이희주 시인 이순원 소설가, 채원배 머니투데이 금융부장

 

2012년 신춘무등문예 시 당선작

 

불고기, 물꼬기 / 유빈

낱말들을 고르게 쓰다듬다 놓쳐버리는 혀

빈 밥상 위 문법책은 달아나는 발음을 따라잡지 못해요

귀퉁이 까매진 책갈피 사이로

나쨩 해변의 파도가 밀려와요

불고기는 불고기, 물고기는 왜 물꼬기일까요

언제나 고개를 끄덕여주는 선생님 그러나

센터 문만 나서면 불고기도 불고기,

물고기도 물고기, 책에 빨갛게 그려넣은

물결무늬 밑줄들, 어려운 차이들이

행간 사이를 꼬불꼬불 헤엄치고 있어요

발화(發話)되지 않는 더듬이

언제쯤 머리로 말하지 않아도 될까요

계약서를 다 채우려면 얼마큼 부드러워야 하나요

듣기연습을 위해 놓치지 않는 9시 뉴스데스크

화면에 떴다 사라지는 얼굴

전송되지 못한 채 들것에 실려나가는 비명소리

면사포 속에서 하노이 강이 부풀어올라요

방향도 통로도 모른 채 꿈에 젖은 갈매기들

셀 수 없는 물이랑을 넘을 때

순서를 따라 늘어서는 인터뷰 행렬

해본 적 없는 질문들, 나는, 너는…

기름에 잠겨 지글거리는 계란 프라이 한가운데

섬처럼 똬리 튼 노른자 한 알

하얀 거울에 노란 얼굴이 밤낮없이 비춰지고

강변의 모래알들 잊으면 될까요

맘 편히 흘러들 수 있는 틈새는 어디 있을까요  

심사평

정체성 담는 노력 담담히 그려내

 

신덕룡(문학평론가·시인·광주대 문창과 교수)

 

  2012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에 많은 예비시인들이 몰려왔다. 효율과 결과만을 요구하는 시대에 시인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다. 보다 행복한 삶을 꿈꾸는 이들의 에너지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현재의 우리 삶이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시로 지친 영혼을 위로하고자 했을까? 너나할 것 없이 물질적 욕망에 휩싸여 정신없이 살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다.

 

  이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시편들에서 시적화자가 과장되어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징징거리고 있거나, 울고 있거나,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형상이 아닌 격정의 토로에 매달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적 대상과 화자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구체적 형상을 통해 의미를 구축해가는 시편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작품은 양은정의 '신발을 위한 레시피', 안준혁의 '검은 강의 기록', 유빈의 '불고기,물꼬기' 였다. 우선, '신발을 위한 레시피'는 삶의 내용과 요리를 결합시켜 시상을 전개했다. 시의 바탕에 깔린 삶의 쓸쓸함이 잘 묻어났지만, 이런 상상력은 신선하지 않다는 결점이 있었다. '검은 강의 기록'은 문명비판적인 시각으로 우리 삶의 음화를 잘 표현했지만 주제가 시적 형상을 압도하고 있었다. '불고기,물꼬기'는 이주여성의 삶을 ‘언어’를 통해 형상화했다. 언어로 동화되지 않는 현실의 틈새를 발견하고, 그 틈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었다.

 

  세 사람의 장단점을 비교한 결과, 시상을 전개시키는 솜씨나 발전 가능성의 측면에서 유빈씨의 작품에 믿음이 갔고,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 성장하길 빈다. 아울러 양은정, 안준혁 두 분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2012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링거 속의 바다 / 김영란

 

온 몸이 글썽거린다 아득한 바다냄새

 

어쩌면 이 신열은 오래 전의 길 하나 열어줄지도 몰라

 

세상은 바다가 낳은 미지근한 비망록일거라고

 

아니, 그 비망록이 낙서들의 끝에 부려놓은 삽화일거라고

 

네가 나른한 힘을 얘기했던 곳으로지금 나는 가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너의 힘을 빌려 나에게 이르지 못할 때마다

 

변명처럼 꺼내든 바다가 아닌

 

방금 전 내 몸의 한 모퉁이로 들어오던

 

링거액 같은 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잠깐의 외출로

 

조회할 수 있는 너를 믿지 않지

 

너의 웃음이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조난의 느낌 하나만으로

 

바람을 이끌고 오고 폭풍을 이끌고 와

 

끝내 범선 같은 고백을 숨겼던 것처럼

 

나 지금도 먼 옛날의 너를 믿지 않아

 

기억이란 몇 방울의 망각으로 걸어나갔던

 

오랜 신열의 발자국들

 

어디선가 때 이른 저뭄이 다가와

 

내 옆구리를 툭 친 것도

 

네가 나로부터 멀어지던 형식이었음을 기억하는 한 순간

 

내 통증의 한 쪽에서 고개를 드는 현실 하나

 

나는 잠시 링거액 건너편에 기대어 놓았던 목발을 챙겨

 

너의 바다가 보일 것 같은 창가로 절룩절룩 걸음을 옮긴다

 

 

 

심사평  김규린 시인

 

형식적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

 

  

작품보다 작품 속의 영혼이 먼저 들여다보여서 감상이 순조롭지 못한 경우가 있다. 예심을 거친 작품들은 선

 

자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토록 다른 4인 4색의 영혼과 그 시력(詩歷)은. 고심하며

 

읽은 작품은 최재우의 '간이역', 김현의 '겨울의 안쪽', 황경철의 '공포의 기록',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였

 

다.

  

 '간이역'에서 최재우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노숙함으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골대합실",

 

"소달구지", "보따리"와 같은 소재를 통해 드러나듯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정겹다. 그러나 그는 그리 길지 않

 

은 시력의 한계 또한 노정시키고 있다. '간이역'에서의 돌연한 장면 전환이나, 그의 다른 시 '포구'에서 드러

 

나는 이미지 분절 등은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김현의 '겨울의 안쪽'은 세밑에 꼬옥 끌어안고 싶은 시이다. 서사를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능력은, 차

 

고 낯설게 만연하는 시들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사적일수록 정제된 호흡과 리듬감을 견지해야 하

 

는 법, 몇 군데 군더더기가 눈에 띈다. 따뜻하지만 너무 잔잔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황경철의 시들은 미숙하고 거칠지만 패기가 있다. 다만 추상적인 대상을 추상적으로 풀어내는 일이 그에게

 

는 힘에 부친 듯하다. 자폐적으로 분산된 이미지들이 제어되지 못한 채 범람하고 있다. 시가 아물 수 있도록

 

그의 상처가 더 깊어지기를 바란다. 깊어진 상처가 그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김영란의 '링거 속의 바다'는 형식적인 면에서 가장 숙련된 솜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자신의 색채가 부족하

 

고 소품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약점도 갖고 있다. 더구나 그의 시들은 작품들간의 격차가 드러나서 기우를 갖

 

게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기는 어려웠다. 모쪼록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

 

신을 열어나갔으면 한다. 숙련된 자의 출발점은 지금 다시 놓여져야 한다.

 

 

 

 

2012년 제5회 영주신춘문예 당선작

 

 

 

 

우리들의 인사법法 / 김경순

 

 

1.

 

지문이 세면대 밸브에 쌓여간다

 

암묵적인 약속처럼

 

조심스럽게 잡고 올렸다 내리며 안녕,

 

밸브를 감싸 쥐고 그 위에 나의 지문을 포갠다, 새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매머드를 화석으로 만나듯

 

비 젖은 발자국에 서로의 무게로 깊이를 더하듯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매일 조우하게 되는 것일까.

 

만나지 않으려 이렇게 만나는 것일까.

 

안녕, 안녕,

 

헤어질 때와 같이.

 

2.

 

당신이 지나간 보도블록을 밟았을 때

 

내가 사려던 책을 당신이 집어 들었을 때

 

한 소리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당신과 나도…

 

춥다는 핑계로 귀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입이 벌어져 있으면 자꾸만 우리는 말이 쏟아질 것 같아요,

 

아침마다 지우개로 입술을 지우던 나

 

당신과 나의 선들이 교차하던 순간

 

내가 웃었기에 당신은 울었다.

 

 

 

 

[응모작]

 

 

계속 되는, 점

 

 

1.

 

가족이 깰까 달빛도 사뿐히 걷는 밤

 

어둠과 맞닿은 자리에서 더욱 짙어지는 까만 점

 

밤은 그녀의 등과 마주해 블랙홀이 되었다

 

별 부스러기 가득한 두 평 우주를 호출하는 등

 

2.

 

태양은 햇빛을 저장하기 위해

 

치타의 몸에 까만 점을 무수히 찍었다지

 

그 모습이 마치 송송 뚫린 구멍 같아,

 

바람이 자꾸만 손가락을 넣어 보는 탓에

 

치타가 뛸 때마다 쉭-쉭-

 

휘파람 소리 난다지

 

줄넘기 하듯 그 구멍을 가볍게 통과하면

 

치타처럼 포효하며 달려볼 수 있을까.

 

 

3.

 

하늘이 바리케이드를 칩니다.

 

앞뒤가 없는 끝이 환한 구멍

 

그 안에 들어서면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응모작]

 

 

빛이 수직으로 서는 이유

 

 

종종 하늘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한 치 어긋남 없이 주욱 뻗어나가는 빛

 

내가 쏘아올린 빛의 끝을 잡아당기고 있다

 

밤새 팽팽한 빛의 기둥에 제가 가진 가장 빛나는 것을 심어주던 하늘은

 

다음날이면 또 나를 보러 한숨에 일억 오천만 키로미터를 달려왔다

 

봉우리며 바위들이 위를 향해 열심히 날을 세우듯

 

바람이 닦고 지나간 자리를 지키는 나뭇가지처럼

 

 

[시 심사평]

 

 

첫 행의 매력에 끌려

 

 

  신인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과거의 낡은 옷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 문학의

 

내일을 보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이 보내온 한 단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읽어줄 각오

 

를 하고 한 편 씩 페이지를 넘긴다. 문학이 죽었다고 개탄하는 시대, 돈이 안 되는 문학을 붙잡고 불면의 밤

 

을 지새우는 문청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 숨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 또한 적지 않은 즐거움을 준다. 더구나 어느 순간 큰 나무로 자랄 만한 신인을 발견하면 이런 걱정은 순

 

식간에 사라지고 설렘과 기쁨보다는, 선배로서 떨림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번에 5회째를 맞는 영주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한 시편들은 800여 편에 이른다. 그 중에는 아직 응모의

 

기본이 안 된 사람들부터, 아직도 원고지에 자필로 정성껏 눌러쓴 글씨도 있고, 미국과 독일에서 국제우편으

 

로 배달된 응모작품들도 섞여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일차적으로 시적 완성도, 새로운 감각, 습작의 수준 등

 

을 고려해서 작품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작품이 한상림 씨의 「임플란트」 외 3편, 김창호 씨

 

의 「자동이체」 외 3편, 정성수 씨의 「배롱나무」 외 2편, 이미화 씨의 「햇빛이 좋은 날」 외 3편, 김경순 씨의

 

「우리들의 인사법」 외 2편 등이었다.

 

  우선 한상림 씨의 경우는, 일상에서 시적 대상이나 상황을 발견하는 힘은 좋으나, 이것들을 시적으로 형상

 

화함에 있어 현실적 리얼리티에 안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좀 더 신인다운 상상력을 발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김창호 씨의 경우는, 시상은 잘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적 이미지를 만들어냄에 있어서 너

 

무 서술적이며 산문적이라는 지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이 자신의 진술로 설명을 하고 나면 독자들이 느껴야 할 것은 그만큼 적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다. 정성수 씨의 경우도 앞의 김창호 씨와 비슷하게 서술적인 이미지가 지나치게 발견되어 산문적

 

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잡은 것은 이미화 씨와 김경순 씨의 작품들이다.

 

이미화 씨의 경우는 시적인 모티프를 형상화하고 시를 갈무리하는 품이 상당한 습작 이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자(誤字)들과 행과 연의 구분 등은 시를 읽어감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곤 했다.

 

반면에 김경순 씨의 경우는 첫 작품, 첫 행부터 읽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앞에서

 

지적한 다른 분들의 단점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응모된 시들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서 당선

 

자로 밀어 손색이 없다는 데 합의했다.

 

  오직 한 사람만을 뽑아야 하는 신춘문예의 속성으로 인해 굳이 최종심에 오른 분들의 작품에서 단점을 지

 

적하긴 했으나, 기성 시인들도 그러한 점들을 완전히 극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탈락

 

한 분들께도 용기를 가지시라고, 위로의 말씀 전하며, 당선자에게는 큰 박수로 축하를 드린다. 아무쪼록 우

 

리 문단의 큰 나무가 되시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 유종인․ 변종태(대표집필)

 

2012년 18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조장 / 오기석

 

히말라야는 죽은 자의 무덤이다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그 무덤이 우뚝우뚝 선다

나는 오직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한다

치켜뜨고 고원을 배회하는 그 눈과 내 눈이 부딪칠 때

히말라야는 죽은 자가 산자를 배웅하는

묵직한 항구다

길은 벌써 하늘로 뚫어져 덩그렇게 허공에 매달렸는데

지금 막 망자의 검은 눈을 독수리가 정 조준한다

이곳의 주인은

고원을 만들었다 무너뜨리는 바람이다

그 바람을 타고 독수리는 날아들고 또 그렇게 떠난다

남은 것은 바람의 길을 따라 나는 망자의 영혼 뿐이다

 

여기서 독수리는 발톱 따윈 쓸모없다

그저 살점을 움켜쥐고 뜯을 수 있는 부리만 튼튼하면 된다

상주도 조문객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들의 목숨은 이미 독수리가 움켜쥐고 있다

그 다음 순서는

모두 바람의 지시에 따라 시간이 알아 할 몫이다

장례의식이 끝나고 죽어서 다시 돌아 올 그 산을 내려간다

이제 남은 것은 망자의 시신과 천장사* 뿐이다

천장사가 도끼로 시신을 난도질한다

그러곤 하늘을 빙빙 도는 독수리에게 살점을 던진다

덥숙덥숙 받아먹는 독수리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

 

*히말라야 고원지대 장례에서 시체의 사지를 분해하여 새에게 던져주는 사람.

 

 

 심사평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언어감각 돋보여

 

  응모작(356편)들이 예년(421편)보다 적지만 작품 수준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어휘들이 난무하고 난삽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언어와 사물의 불일치라는 숙명적 한계를 극복하고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치열한 도전의식(고뇌)이 엿보이는 작품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작품으로는 이돈형의 ‘아무르강의 늑대’, 김소현의 ‘칼’, 조영민의 ‘그리움을 수선합니다’와, 오기석의 ‘조장’이란 작품이다.

 

  이돈형의 ‘아무르강의 늑대’란 작품에서 아무르강의 겨울은 바람이 누워있던 자리에 서서히 결빙이 시작되고 굶주린 야성의 울음소리 속으로 늑대사냥의 시작은 생사를 가르는 고단한 생의 애환 속에서 벌이는 생존의 속성을 확인시키고 있는 작품이다.

 

  김소현의 ‘칼’이란 작품은 칼을 갈아 냉동고기를 썰 때마다 아들(작자)은 먼 잠 속의 아버지를 생각한다. ‘네 아버지는 개다’란 어머니의 버릇처럼 외치던 말을 상기한다. 썰리는 고기 속에 손을 넣어 어머니를 만져보고 싶은 충동, 도축장의 소의 혀를 씹으며 짐승의 울음흉내와 겨냥할 수 없는 거리(칼)을 겨냥하는 산자의 일상을 그려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조영민의 ‘그리움을 수선합니다’에선 오랫동안 묵혀둔 아버지의 문서를 정리하다 생존 시 외면했던 아버지의 삶을 아무 가책 없이 허물다 그리움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저 세상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읽어내고 있다.

 

  오기석의 ‘조장’이란 작품은 네팔의 중턱 히말라야에서 성행되고 있는 조장(鳥葬)이란 전래적 장례를 통하여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를 주목하며 시신을 주거지 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해체하여 독수리에게 먹이는 장례이다. ‘그를 바라보는 나도 시신이 되어 던져진다/ 독수리에게 물고 뜯기는 나의 살점이 나를 바라본다’는 이미지 포착이 돋보인다.

 

  앞으로 시작활동의 핵심은 대상(사물)을 접촉할 때 관념을 배제하고 탈관념의 사물시 쓰기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 시단에 큰 재목으로 대성하기를 바라며 오기석의 ‘조장’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심사위원 : 정연덕(시인)

 

 

 2012년 경향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늘들의 초상 / 최호빈 

 

 

 

 심사평

 

“개성과 진실은 시를 계량하는 중요한 잣대”

 

 도종환·박주택 시인

 

  신춘문예는 말 그대로 ‘새 봄의 문학’이다. ‘새 봄의 문학’은 혹한과 얼음을 이긴 ‘새싹의 문학’이자 ‘꽃핌의 문학’이다. 이는 오랜 탁마와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순간을 견디며, 개성적인 세계를 창조하려는 노력 끝에 찾아오는 문학이다. 이 점에서, 시를 구성하는 미적 형식과 내용을 직조하는 시선, 제재를 가공하는 세공술, 그리고 이를 각고로 새겨 돋우는 치열한 정신은 ‘새 봄의 문학’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예술적 덕목들이다.

 

  예심에서 올라온 시편 중에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끈 것은 시가 지니고 있는 본령을 견지하면서도 개성적 시각으로 삶의 진실을 드러낸 것들이었다. ‘개성’과 ‘진실’은 시를 계량하는 중요한 잣대로 ‘지금까지, 어떻게 썼는가’보다는 ‘앞으로,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포함하고 있어 미래적이다.

 

  당선작 ‘그늘들의 초상’은 대상과 세계를 해석하는 강한 추동력과 낮은 자의 고통을 존재의 장소에서 불러내는 동일자의 윤리를 보여준다. 함께 투고한 시편도 고르게 완성도가 높아 높은 점수를 받았다. 후보작 ‘곰탕’은 조곤조곤한 어조로 “뼛속까지 곰삭은 그리움을 푹 고아내고 나면 눈꽃처럼 퍼지는 풍경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와 같이 세계를 긍정한다. 그러나 산문적 사변(思辨)이 골격을 이루고 있어 아쉬움을 남겼다. ‘로켓맨’은 시적 형상화라는 측면에서 튼튼한 신뢰를 얻고 있지만 대상과의 간격이 지나치게 좁은 것이 흠이었다. ‘그 자작나무 숲으로’는 참신하기는 하나 주제를 드러내는 데 인색했다. 모두에게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는 말과 같이 ‘견인’과 ‘겸양’을 함께 권한다.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역을 놓치다 / 이해원

 

실꾸리처럼 풀려버린 퇴근 길오늘도 졸다가 역을 놓친 아빠는목동역에서 얼마나 멀리 지나가며 헐거운 하루를 꾸벅꾸벅 박음질하고 있을까

 

된장찌개 두부가 한껏 부풀었다가 주저앉은 시간텔레비전은 뉴스로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핸드폰을 걸고 문자를 보내도 매듭 같은 지하철역 어느 난청지역을 통과하고 있는지 연락이 안 된다하루의 긴장이 빠져나간 자리에 졸음이 한 올 한 올 비집고 들어가 실타래처럼 엉켰나

기다리다 잠든 동생의 이불을 덮어주고

다시 미싱 앞에 앉은 엄마

헝클어진 하루를 북에 감으며 하품을 한다

 

밤의 적막이 골목에서 귀를 세울 때내 선잠 속으로한 땀 한 땀 계단을 감고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현관문 앞에서 뚝 끊긴다안 잤나졸다가 김포공항까지 갔다 왔다

늘어진 아빠의 목소리가오늘은 유난히 힘이 없다

 

심사평

 애달픈 시… 서민가정의 풍경 잘 묘사

  지난해보다 작품 수준이 높다는 것이 심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지만, 개성이 강한 작품이 많지 않다는 지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행을 타는 것인지 응모작들이 서로 비슷비슷한 점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창작교실 등의 영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예선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 중에서 특히 정수박이, 설수인, 이해원의 작품들은 당선작으로 일단 손색이 없는 것으로 판단됐다.

 

  정수박이의 ‘능선을 바라보며’는 무리 없이 읽히는 장점을 지녔으며 호소력도 상당하다. 한데 내용이 너무 평범해서 어디서 한 번 들은 것같이 귀에 익다. ‘민달팽이’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껍데기조차 지니지 못하고 대학을 나온 아들의 취직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오늘의 아버지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그런데도 당선작으로는 무언가 1퍼센트 모자란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어느 한 구석 맺힌 데가 없어서일 것이다. 설수인의 시 가운데서는 ‘투석실의 하루’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직접적인 체험 없이는 쉽게 얻을 수 없는 표현이라는 점이 우선 호소력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고통을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한데 조금 장황하고, 내용 탓인지 읽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대목이 없지 않다. ‘줄 끊긴 바이올린’이나 ‘앉은뱅이 저울’에 대해서도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원의 ‘역을 놓치다’는 참 따듯하고 애달픈 시다. 여러 면에서 오늘의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하지만 평화스럽고 행복한 서민의 가정 풍경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새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흠을 가졌다. ‘육교 밑 고고학자’나 ‘냉장고는 태교중’은 비유가 안이하고 서툴다. 이상의 후보작들을 놓고 숙의한 끝에 시의 완성도에 무게를 두기로 하면서 ‘역을 놓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나비가 돌아오는 아침 / 허영둘

 

  젖은 잠을 수평선에 내거니 새벽이다

  밤사이 천둥과 함께 많은 비가 내렸다

  예고된 일기였으나 어둠이 귀를 키워

  여름밤이 죄처럼 길었다

  생각 한쪽을 무너뜨리는 천둥과 간단없는

  빗소리에 섬처럼 엎드려 나를 낭비했다

 

  지난봄, 바다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 세상은 문득 낯설어졌고 파도는 사소한 바람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코발트블루 바다는 손잡이 없는 창窓, 절망보다 깊고 찬란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나의 슬픔도 그토록 찬란했을까 나는 구름 뒤에 숨어 낮달처럼 낡아갔다 들판의 푸른 화음에 겹눈을 빼앗긴 나비를 기다리며 나는 오지 않는 희망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다

 

  바다가 깨어난다

  졸려도 감을 수 없는 희망

  돌아서는 파도의 옷자락을 따라가면

  거룩한 경배처럼 엎드린 섬들

  나는 존엄을 다해 아침 바다의 무늬를 섬긴다

  희망이란 소소한 풀잎이거나

  날 비린내 풍기는 고깃배의 지느러미 같은 것

  풀잎도 계단도 허리까지 젖어 궁리가 깊다

  밤새운 탕진에도 하늘이 남아 드문드문한

  구름 송이들은 젖은 마음을 문지르는 데 요긴하겠다

  마루 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담장 아래 칸나의 방에 볕이 붉게 들고

  거미는 방을 훔치는 수고를 덜겠다

  느슨하던 수평선도 다시 팽팽해져 나비를 부르고

  고깃배 한 척 안개를 젖히며 희망처럼 돌아오고 있다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노루귀가 피는 곳 / 최인숙

 

그래 그래 여기야 여기

신기해하고 신통해하는 것은 뜸이다

안으로 스미는 연기의 수백 개 얼굴이

아픈 곳을 알아서 나긋나긋 더듬는다

그러고 보면 뜸은 어머니의 손을 숨기고 있다     

뜸과 이웃인 침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침의 얼굴과 대적한 적 많아

보는 순간 심장부터 놀라 돌아서곤 한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뜸이 다 사그라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어머니도 부엌에서 또 뜸을 뜨고 계셨다

아침저녁 굴뚝으로 하늘 한켠을

 

할머니 무덤 여기저기에

노루귀가 피었다

겨울과 봄 사이

가려워 진물 흐르는 대지에

아니 너와 나의 그곳에

누가 아련히 뜸을 뜨고 계시다

심사평

이질적 형상화로 작가의 시적 내공 고스란히 묻어나     응모작품들을 공들여 읽었다. 요즘의 한국시가 지나치게 난삽하면서 그 길이도 길어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곤 하는데, 이번 응모작들도 그런 경향들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시인이 지니는 표현 의도는 최적의 언어로 구조화되고 형태화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표현 의도를 겉으로 드러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생략과 함축으로 끌어안을 때 견고하게 정제된 시를 만날 것이다.

 

  <노루귀가 피는 곳>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이 시의 작자는 작은 풀꽃인 ‘노루귀’에서 환기되는 정서를 한방요법의 ‘뜸’으로 풀어내고 있다. ‘뜸’은 약쑥을 비벼서 인체의 혈 위에 놓고 불을 붙이는 치료행위이다.

 

  연기를 내면서 쑥이 타들어가고 그 기운이 혈을 자극해서 막힌 기를 소통시킨다. ‘노루귀’의 식물이미지를 한방치료 요법인 ‘뜸’으로 병치시킨 시인의 착상도 새롭지만 아침저녁 굴뚝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는 어머니의 노고와 ‘뜸’이 피워 올리는 연기를 합일시킨 상상의 능력도 두드러진다.

 

  상호 이질적인 이미저리(‘노루귀’ ‘뜸’)를 연관시킨 시인의 상상력은 이 시의 작자가 상당한 시적 내공을 쌓은 분임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준다. 같은 시인의 투고 작품 <무지개>도 선연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이분의 역량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최종까지 남았던 작품들은 <우포의 달 외 2편>, <할머니의 기도 외 3편>, <다리가 잘린 소녀에게 외 2편> 등이었다.

  이분들도 나름대로 시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들이다. 정제된 시에 이르는 노력들을 계속한다면 좋은 시에 이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훌륭한 시인으로 우뚝 서 주기를 바란다.

 

 

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얼룩진 벽지 / 성명남

 

독거노인이 사는 벽 귀퉁이에

어린 재규어 한 마리 숨어 산다

우거진 풀숲 사이로 자세를 낮춘

짐승의 매화무늬가 보인 건

열대우림 같은 우기가 시작된 며칠 뒤였다

지직거리는 TV속 동물의 왕국에선

재규어가 강물 속에 꼬리를 담그고

살랑살랑 흔들어 물고기를 잡는다

노인은 자신의 퇴화된 꼬리를 자꾸 만져보다

돌아누우며 TV를 꺼버렸다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렸다

하루가 다르게 짐승의 영역은 확대 되어갔다

영역을 표시하는 그 채취만으로

목덜미를 물린 듯 노인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짐승이 다 자랐을 때 닥칠지도 모를

치명적 위험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

점점 몸집을 불린 수컷 재규어가

몸이 근질거릴 때마다 혀로 제 몸을 핥는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기세다

범람한 강물이 골목을 덮쳤을 때

노인의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맹수가 펄쩍 뛰어내렸다

순식간에 평원을 가로질러 노인을 물고 사라졌다

도배장이가 벽지를 쫙 뜯어내자

그 속에 무성한 열대밀림이 펼쳐졌다

심사평

절제의 미학과 따뜻한 응시로 잘 표현

  

  늦게 담은 동치미는 익지 않았고 이곳저곳 지인들의 집에서 보내온 김장김치도 아직 맛이 들지 않았다. 먼저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지 않고 밖에 내놓은 김치 역시 설익었다. 먹기에 마땅치 않다.

 

  금방 담은 김치는 배추의 고소하고 싱싱한 맛과 양념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그 싱그러움으로 먹을 수 있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면 그 맛을 잃게 된다. 양념이 고루 배고 익어서 맛이 든 김치가 밥상에 오를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몇 포기 남아있지 않은 묵은 김치를 꺼낸다. 역시 이 맛이야.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한껏 기교를 부리며 은유와 비유로 멋을 부린 시들이 막 버무린 김치와 같다면 오래 묵어 양념들이 고루 배고 맛이 든 김치, 그러나 배추의 처음 싱싱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아삭아삭거리는 김장김치는 온몸으로 밀어올린 울림이 있는 시, 깊은 맛이 있는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최종심으로 올라온 두 작품은 '얼룩진 벽지'와 '보도블록'이었다. 그러나 '보도블록'은 신선한 시선이 돋보였음에도 이를 받쳐줄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않았다. 당선작으로 뽑은 '얼룩진 벽지'는 김치와 같았다. 푸른 배추의 싱싱함을 가진 잘 익은 김장김치와 같은 시. 긴장감을 잃지 않고 절제의 미학과 '동거'와 같은 다른 시에서 보여준 깊고 따뜻한 응시를 가진 이 시를 놓고 심사위원들은 즐겁게 당선작에 올려놓았다.

 

  처마 끝에 걸린 곶감들이 잘 마르고 있다. 곶감은 제 몸의 수분을 햇빛과 바람 앞에 알몸으로 온통 내놓고 말라갔을 때 그 속에 비로소 떫은맛이 변하여 달고 붉은 속살을 갖게 된다.

 

  이제 파도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새로운 시인이 헤쳐 나갈 험난한 여정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시인 김수영의 시 한 구절이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시인정신으로 나는 그 표현을 읽었다. 적어도 시를 쓴다면 이 정도의 자세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목숨을 걸어보는 정도 말이다.

 

심사위원 문정희 최영철 박남준(이상 시인)

 

 

 

2012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목련꽃 / 조영민

꽃이 문을 꽝 닫고 떠나 버린 나무 그늘 아래서이제 보지 못할 풍경이, 빠금히 닫힌다보고도 보지 못할 한 시절이 또 오는 것일까닫히면서 열리는 게 너무 많을 때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다바람이 몰려와 모서리마다 그늘의 알을 낳는다온통 혈관이고 살인 축축한 짚벼늘이 느껴져아주 오랫동안 지나간 것들의 무늬가 잡힐 듯한데…

 

꽃 진 그늘에는 누가 내 이름을 목쉬게 부르다가 지나간 것 같아꿈이나 사경을 헤맬 때 정확히 들었을 법한 그 소리가왜 전생처럼 떠오르는 것일까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태양이 구슬처럼 구르는 정오. 꽃그늘에 앉으면뒤돌아서 누가 부르는 것 같아부르다 부르지 못하면 냄새로 바뀐다는데뒤돌아서 자꾸만 누가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나무를 꼭 껴안아 보는데나무에선 언젠가 맡았던 냄새가 난다

 

심사평

 활기찬 이미지 직조·신선한 묘사 뛰어나”  예심을 거쳐 올라온 이가 8명이었다. 전반적으로 과도한 수사와 진정성이 얕은 말놀음에 빠져 있어서 심사위원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으나, 이를 압축해들어가 마지막까지 논의된 몇 편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그러한 의구심이 떨쳐지는 듯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이유진의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외 몇 편과 조영민의 ‘목련꽃’ 등 수편, 그리고 염민기의 ‘이식’ 등을 놓고 저울질을 했다. 그 결과 쉽게 ‘목련꽃’이 당선작으로 선택됐다. 다른 작품에 비해 아주 개성적이어서 단연 돋보인다는 평을 들었다. 함께 보낸 다른 작품의 수준도 고르게 느껴졌다. ‘이식’ 등은 새로운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의 과도한 학대로 메시지가 애매하다는 점에서, ‘내 침대엔 가끔 토끼가 자요’ 등 몇 편은 작품은 아주 개성적인 데다 일정 수준을 고르게 유지하고 있어 돋보였으나 주제를 부각하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제외됐다.

  ‘목련꽃’은 제목의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아주 짜임새 있는 이미지의 구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늘은 폐가다 그것은 새집이나 마찬가지/ 나는 폐가의 건축자재로 이뤄졌다’와 같은 단연 돋보이는 구절들로 유장하게 짜나가는 솜씨가 아주 뛰어났다. 묘사도 정확하고 신선하다. 이미지의 직조 솜씨도 꾀죄죄하지 않고 상상력의 구사도 아주 활기에 차 있으면서도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꽃과 나무, 그늘과 밝음을 얽어 짜면서 ‘몸의 쪽문을 다 열어 놓는’ 그 고요한 시선이 눈부시다. 다만 이 시와 함께 보내온 그의 작품들의 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겉멋과 자의적 이미지들이 걷어내졌으면 더 좋았으리라. 대성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문인수·이하석

 

 

201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저무는, 집 / 여성민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심사평

詩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뤄

 

  물리학에서는 수학적 사건이 있고,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사건이 있고, 시에서는 말의 사건이 있다.

  하나의 단어가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전체를, 누구나 알 수 있는 단일한 사건으로 만들 때 그것은 시에 의해서고, 그것은 시인의 일이다. 말이 사건이 되지 못하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에 있어서 말의 풍경은 하나의 사건이고, 그대로 지평이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에서 받은 스물세 분의 시는 오랜만에 우리 시의 지형 깊은 계곡으로 우리를 놀게 하고, 높은 산으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며 드넓은 바다에서 서 있게도 하는 행복한 경험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그 울렁거리는 느낌을 타고 세 분의 시를 골랐다. 일일이 짧은 감상을 달고 토론을 거쳐 힘들게 또는 아쉽게 손에서 터는 작업을 거쳐 남은 세 편의 작품을 두고, 우리는 잠시 부러 딴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딴 얘기를 하는 둥 마는 둥 다시 토론에 들어가 최호빈의 ‘고민의 탄생’, 김미영의 ‘상자’, 여성민의 ‘저무는 집’을 골랐다.

 

  최호빈의 시는 시상을 치밀히 전개해 나가며 이미지를 구상화시키는 솜씨가 일단 돋보였다. 단어 하나의 선택에서 다년간 습작을 한 흔적이 분명히 드러났다. 김미영의 시는 우리 삶의 비루한 것들을 보듬어 소중한 꽃을 피워 내는, 애정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따뜻함이 편편에서 맡아졌다.

 

  아무리 시가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의 시라 할지라도 자기의 바깥을 보는 이런 시선은 이 즈음에는 꽤나 귀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 향기는 더 짙었다.

 

  그러나 최호빈의 시는 숲이 울창한 만큼 베어 낼 나무들이 꽤 있었다는 점에서, 김미영의 시는 아직 피상적이라는 점에서 제외되었다. 여성민의 시는 반복되는 말과 말로 공간을 이루고 거기에 막연과 아연의 풍경들을 자리하게 해, 시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고 있었다. 좋았다. 축하한다.

 

 

201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미줄동네 / 박광희    

뿌리 같은, 오래된 골목이 줄에 걸려 바동거린다나지막한 지붕들이 이마를 맞댄 좁다른 풍경TV안테나선, 전깃줄, 빨랫줄들이 하늘을 묶은제각각의 각도를 가진 도형들로 골목은 늘 무겁다낡은 시간을 매단 전봇대, 습한 담벼락에 숨어있던표적들이 나타날 때마다 한 뼘씩 몸집이 커지는외등들, 거미는 가만히 자신의 넓적다리를 숨긴 채낮고 좁은 골목길을 얼기설기 엮어 낚아챈다돌돌 말아 고치로 엮어내는 솜씨는 놀랍다어쩌면, 이 골목 사람들은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아니, 줄의 포박을 알고도 모른 척하는 지도 모른다부글부글, 그깟 몸부림 쯤진작 진흙 바닥에 가라앉히면 그만인 것을바람의 입질에 걸려든 젖은 골목들의 눈 속허공이 공허할 수 없는 건 저 줄들이 만드는 유혹 탓코르셋처럼 집들이 꽉 끼인 것은 줄의 팽팽한 긴장 탓낡은 모서리처럼 표지가 뜯겨져 나가내력조차 희미해진 이곳 사람들, 뻐꾸기시계처럼때가 되면 문을 열고 뛰쳐나가 울음 울면 그뿐참붕어 같은 골목은 언제 줄을 벗어날 수 있을까나지막한 허공을 저인망 줄들이 집들을 묶고 있다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다 젖은 도형들이허우적거린다, 골목이 환하게 열린다일제히 미끼를 무는 붕어들의 입질흰 와이셔츠 폐타이어, 화분, 방수천막지를 물어뜯는다장마전선의 북상에 바삐 방적돌기를 부풀리는 거미걸려든 집집의 내력들이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다동맥경화증에 걸린 골목, 줄에 걸려 파닥거린다

 심사평

 삶의 고달픔과 어두움 반전시킨 후반부 감탄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 가운데 5편을 선정했다. 정정례의 `내력' 박명삼의 `빈센트 반 고흐의 귀' 김기순의 `미용실' 오영애의 `춘신 春信' 박광희의 `거미줄 동네'였다.

  이 중 최종 세 편을 압축해 논의했다. `미용실에서'는 감각이 뛰어났고 일상적 삶을 노래한 것은 좋았으나 사유의 깊이가 미흡했다.

  `춘신 春信'은 발상은 좋으나 주제의식이 명징하지 않았고 시적인 역동성이 약하여 평면성에 그치고 말았다. 박광희가 응모한 여섯편 모두의 수준이 고르고 특히 그중 단연 돋보인 작품은 `거미줄 동네'였다.

  이 작품은 현실인식이 뛰어나고 상상력과 시를 구성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특히 이 시의 후반에서 보여준 “소나기가 쏟아진 다음 골목이 환하게 열리는”이라는 이미지 묘사는 시의 전반을 지배하는 삶의 고달픔과 어두움과 공허를 반전시킨 점이 이 시를 더욱 빛냈다. 매우 우수한 작품이었다.

이승훈 한양대명예교수, 이영춘 시인

 

201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 / 정영희

아무르 강 소인이 찍힌 항공우편이 도착했다

우표 네 귀마다 고드름이 박혀있는 흑갈색 편지에는

온난화 현상도 이곳에선 세계대백과사전에서나 읽어보는 호사라며

한낮에도 발가락을 날개 안쪽 깊이 파묻고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순천만에서 담근 농게 장을 벽돌 빵에 치즈대신

발라먹고 끼니를 때운다는 이야기며

새끼들로 인한 궁기窮氣때문에 늦은 저녁까지 시베리아 벌판에서

발품을 팔고 돌아온다는 행간에는 한숨이 진하게 배어났다

 

철새라고 부르는 비아냥 때문에 눈자위 진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대목에서는 먹빛 하늘을 갈기처럼 찢고 싶었다

허기로 눈밭에 시리도록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이젠 지쳐

순천만의 텃새로 귀화를 결심하고 있다는 추신에 이르러서는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갯가 짱뚱어의 눈알이 봉분처럼 튀어나온 이유를 알겠다

망둥어는 왜가리 공습을 기어코 막겠다며 전망대까지 벌써 올라와 있었고

칠게들은 뻘 구멍 속에 흑두루미의 식량을 비축하느라

열 발톱이 문드러질 정도였다

 

흑두루미의 귀환 아닌 귀화를 위해 탄탄한 움집이라도 예비해야 한다며

풍속을 온몸으로 가늠하고 있는 갈대의 심지도 깊었다

너울은 먼 바다에서 싱싱한 먹잇감을 데리고 오느라

하루에도 몇 번씩 지그재그로 물길을 오르내렸다

 

냉기가 옷깃을 쓸며가자 사람들이 탐조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깃털 스쳐가듯 달이 구름을 밀어 올리자

쿠르르, 쿠르르, 카아오, 카아오!

회색 부리를 비틀며 북쪽 하늘에 까만 점들이 펄럭거렸다

이백 스물여덟마리 대가족의 귀환 아닌, 귀화였다

 

 심사평

 

“철학적인 시세계 한폭의 그림 같아”

  예심을 거쳐 올라온 시를 읽었다. 문단에서 시 분야가 침체되어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출품작의 수에 비해 시의 수준이 높지 않았다. 실험정신이 살아 있는 시도, 삶을 치열하게 노래한 시도 드물었다. 이슈가 될 만한 시의 흐름도 눈에 띄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시의 완성도도 낮았다. 세상을 들었다 놓을 절창을 만나고 싶은 기대를 안타깝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의 ‘귀화(歸化), 혹은 흑두루미의 귀환(歸還)’과 권시은의 ‘프리다 칼로가 익어가는 팔월’을 놓고 고심한 끝에 정도전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권시은의 작품들이 완성도는 더 높았으나, 정도전의 시가 보여준 세계를 바라보는 깊이와 ‘철 이른 폭설이 자작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와 같은 수일한 이미지에 표를 던졌다. 정도전의 시는 다소 설명적 이여서, 행간에 이미지의 증폭이 없어 시의 맛이 반감되고 있다는 단점도 지적되었음을 밝힌다.

 

  위의 두 명의 시 외에 선자들의 관심을 끓었던 작품에는,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황재운의 ‘운주사’와 치밀한 묘사가 돋보인 천선필의 ‘자화상’이 있었다.

 

  당선자도 낙선자도 모두 분기하여 우리 문학사를 빛낼 시인이 되길 바란다.

*곽재구

광주 출생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사평역에서’가 당선 ▲오월시 동인으로 활동했고 신동엽 창작기금과 동서 문학상 등을 수상 ▲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 ‘참 맑은 물살’, 동화집 ‘아기 참새 찌꾸’ 등

 

*함민복

▲충북 중원군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제6회 윤동주문학대상 수상 ▲시집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말랑말랑한 힘’등을 냈고, 시에세이 ‘절하고 싶다’ 등

 

201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철새를 만나다 / 홍철기

 

문득뭇별들의 제자리걸음이그렁그렁한 눈물을 머금게 하는밤안개 속 방파제는육지로 난 길 인양어서 나아가 보라며건너가 보라며 나를 부르는데엉겨 붙어 나를 말리는바람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울먹일 때빈 껍질만 남아 뒹구는 희망피난민처럼 몰려왔다

 

이젠 떠나고 싶은데갈 곳이 없는지 멍자국 같은 사연하나 둘 모여 불을 밝히고마을을 이루고 그래서 한세상어우러진 잡풀처럼 흔들릴 때알고 있었다 저마다 소금에 저린마음 한 다발씩 묶어 쌓아두고 있음을

 

맨 정신엔 타오르지도 못했던마음 불쏘시개 삼아한 잔 두 잔 마신 술에취하기는 바다가 취하고 끝내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들다 고꾸라지며살 아 야 하 나이어지지 못하고 부서져 되돌아가 버리는 말담뱃재 떨듯 매일같이 칭얼대는희망쯤이야 쉬이 떨어내면 그만이라고말보다 먼저 떠난 파도가다한 힘으로 와 쓰러질 때.

 

저기 저 봉두난발한 바닷바람사이 위태위태하게 날아가는철새한 마리

 

심사평

  시는 궁극적으로 삶 혹은 체험의 기록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는 언어 예술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작품을 선정함에 있어 언어예술성을 담지한 체험의 진솔성이 기본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격을 갖춘 작품들 중에서 최종적으로 낙점을 받기 위해서는 다른 작품에 비해 감동의 진폭이 남달라야 한다.

 

  곡진한 정서가 튼실한 시적 형상화를 이루고 있어 선자의 손에 최종까지 남은 분들은 홍철기 ‘철새를 만나다’, 김은실 ‘겨울, 민원을 내다’, 임복금 ‘갈대숲에서’, 노원숙 ‘소라보 당신’, 이근영 ‘고추말리기’였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은 모두 생의 갈피에서 길어 올린 투명하고 절절한 정서를 언어미학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 하였다. 그러나 김은실과 임복금의 작품은 몇몇 군데에서 노출되는 불투명한 표현 때문에, 노원숙과 이근영의 작품은 안이하고 상식적인 표현 때문에 시적 긴장감이 이완되고 있다.

 

  홍철기는 같이 응모한 ‘금일도’의 작품도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났다. 특히 철새를 통해 인생의 한 단면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철새를 만나다’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선명한 묘사력, 구조적 안정감과 더불어 유려한 리듬감을 확보한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리하여 ‘철새를 만나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훌륭한 시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양병호(시인, 전북대 인문대 학장)

 

201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우물이 있던 자리 / 이승혁

잠 못 이루는 잔별들이 풍덩 깊은 우물 속으로 빠져 드는 밤

할미의 쇠잔한 잔기침을 받아내는 밤안개가

처마 끝에서 너울지며 유영하고 있었지

빨랫줄에 걸린 물때의 온기가 자정을 적실 때면

어린 나의 입속으로 곶감 같은 어미의 숨결이

아득하게 쏟아졌었지

위태로운 유년을 닮은 초승달이

내 여린 이마를 가만히 보듬고 가곤했지

바다의 능선을 타고 돌아오던 메아리가

어린 치어들을 깨워놓고 산 그림자 속으로 흘러가던 날

두레박을 혼자 끌어올리자

변성기의 새벽들이 사춘기처럼 찾아왔지

할머니, 내 울대의 잔별들이 사라졌는지

우물에선 맑은 목소리가 올라오지 않아요

누군가 머릿속에 방생한 악몽들만 짜디짠 입가를 헤엄치고 있어요

줄이 끊어진 두레박을 기울여야 또 다른 힘을 얻던 유년의 꿈들도

더는 담겨지지 않아요

얘야, 네 어미의 바다는 새벽시장의 마른 비늘들 궤짝의 틈이란다

횟 속 깊이 박힌 몇 개의 미늘과 목젖을 열 때마다

아아…말이 되지 못하는 실어증의 힘으로만 너를 낳았단다

그렇게 할머니의 유언이 몇 줌 두레박 속의 전설로 담겨지는 사이

어머니의 바다 더 깊은 궤짝들 틈으로 실종되었고

지금은 어떠한 우물거림으로도 씹히지 않는 먼먼 날들의 그 바다

 이승혁(19)군

인천 강화고 3학년 `

2011 만해축전 제13회 전국고교생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

하늘이 당선자를 정해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기성문인들에게도 힘들고 까다로운 신춘문예의 관문을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거뜬하게 통과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경인일보 신춘문예 사상 최연소 당선이다. 지난해 8월 인제실내체육관에서 펼쳐진 만해백일장에서도 탁월한 구성의 작품을 선보이며, 심사위원단의 호평을 받았었다. 심사위원들은 이군의 수상작 `우물이 있던 자리'에 대해 시적 감수성의 통합에 성공한 작품으로 유년기의 체험과 소재, 의식들을 하나의 감수성으로 통합해 내적 질서를 창조해 내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2012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흰꽃이 지다 / 오영애 흰꽃이 진다 한꺼번에 진다 비를 맞으며 서서 수십 톤씩 진다 무더기무더기 진다 바야흐로 진다 가슴이 하나 진다 통곡하듯 진다 둥둥 떠서 진다 꽃상여로 진다 절뚝절뚝 진다 맨땅위에 진다 색 없이 진다 화 없이 진다 자식 없이 진다 원수 없이 진다 수의(壽衣) 없이 진다 실로 꽃 곁에 가까이 울며 서 있는 장바구니 든 나도 진다

 

심사평

오롯한 말솜씨와 창조적 가락  

  시처럼 짜맞춘 시, 시로 보이기 위해 안달하는 시, 쓰는 사람 스스로도 재미 없을 그런 시를 읽는 일은 피곤하다. 해묵은 사회적 낭비. 기성 양복을 입은 듯한 말씨만 번잡스럽다. 이즈음 평균 취향이 그렇다며 넘기고 말기에는 씁쓸할 따름. 신춘문예 당선을 겨냥한 신인이라면 자기 목소리를 갖고자 고심한 흔적 정도는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마지막까지 남은 세 편을 두고 뽑는 이는 그 점을 먼저 살폈다.

 

  김혜경의 ‘진화론’은 변기에 앉는 삶에서 거미의 생태를 유추한 시다. 자신도 “발 대신 다리”가 “돋아날 듯” 쓰리다는 마무리까지 무리가 없다. 그러나 다른 거미 글감 시들과 나뉠 만한 확연한 울림은 얻지 못했다. 김혜강의 ‘비’는 제목 그대로 비에 대한 풍정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엮은 직조술이 참신했다. 그럼에도 비를 빌린 땅과 하늘의 교감을 “옥황상제와 몸 섞는 소리”라 한 데서 평범에 머물고 말았다.

 

  오영애의 ‘흰꽃이 지다’는 앞선 둘에 견주어 신춘문예용 시에서 멀다. 단형에다 담긴 속살 또한 막연하다.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짜임도 ‘ㄱ이 진다’는 월의 엮음과 되풀이로 한결같다. 그것을 받치는 몸말은 명사형에 갇혀 감각적 표현성을 지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창조적이다. 자기 가락을 지녔다. 자신이 겪은 바를 자기 목소리로 뱉는 힘이 시인 되는 첫 조건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게다가 말솜씨까지 오롯하다. 이 시는 삶의 막연한 속살로 길게 이어진 앞과 “장바구니 든 나”를 내세운 짧고 구체적인 마무리 월, 두 매듭으로 짜였다. 그런데 둘 사이 단층이 지닌 뜻은 크다. 앞 매듭에 넘치는 감상이 삶의 깊이로 뒤바뀌는 놀라운 비약을 뒤 매듭이 마련한다. 한 여자가 겪은 아픈 간난을 단형의 가락으로 울림 크게 살려 낸 절창 ‘흰꽃이 지다’. 오 오 시인, 멀고 멀 창작의 길에서 독야청청 피고 피기를.

 

<심사위원 박태일·김언희>

 

201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름사촌 / 조규남

내 발도 하늘을 문질러본 기억이 있다 나무이파리처럼 시원하게 흔들리며 하늘에 발자국을 찍어본 일이 있다 바람이 건들대며 쓰다듬고 지나가면 구름도 덩달아 내 발을 슬쩍 신어보고 도망가던 자국이 자꾸 간지럽다운동장 놀이기구에 몸을 기대고 물구나무섰을 때 아무리 참으려 해도 거꾸로 몰린 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쿵, 내려왔던 하늘이 되돌아가버리자 또 다시 땅을 딛고 온몸 받히며 살아가는 내 발지금도 이파리가 되었던 짧은 시간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누워 뒹굴면서도 무심히 하늘을 더듬어보고 걸어 다닐 때도 발꿈치를 들어올리며 바람 느끼고 싶어 들썩인다

 

대낮에도 통로가 보이지 않아 눈물을 찔끔 훔치는 일도 최초의 천둥인 듯 크릉크릉 부르짖는 버릇도 내 속에 흐르는 구름의 피가 농간을 부리기 때문

 

발이 간지러운 가로수가 몸을 비튼다아무리 걸어도 굳은살 한 점 박히지 않은 부드러운 초록 발, 수많은 발바닥 활짝 펴 하늘을 닦는다

 

죽어서도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니고 싶은 발

심사평

 심사위원=이문재<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안도현<시인·우석대 교수>

 

“발상의 신선함에 의견일치”

 

  예심에서 10명의 작품이 올라왔다. 응모자의 이름이 지워진 채 우편으로 보내온 본심 원고를 미리 읽고 심사위원 두 사람이 농민신문사에서 만났다. 예년에 비해 서정성은 강화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수준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똑같이 내놓았다. 그만큼 참신한 언어가 드물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당선작을 고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선작을 <구름사촌>으로 하자는 의견이 곧바로 일치하였다. 이 시는 먼저 발상의 신선함이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후반부로 가면서 인간의 시선을 나무라는 자연의 시선으로 확장시키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시라는 게 세상을 뒤집어 볼 줄 아는 힘을 내장한 양식이라면 이 시야말로 물구나무서서 세상 바라보기를 시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응모한 <옴마댁>의 ‘눈망울로 길의 태엽 감았다 풀기를 반복’한다는 빛나는 구절도 신인으로서의 신뢰를 주기에 충분했다.

 

 마지막까지 우리 손에 남은 <찔레차>는 ‘허기가 꽁무니까지 들어붙은 새들이 날아와 빨간 눈을 하나씩 몸에 달고 날아오른다’와 같은 감각적 표현이 일품이었지만 주제를 집약시키는 힘이 조금 부족해 보여 아쉬웠다. 또 다른 분의 작품 <깃털멧돼지>는 엉뚱하고 재미있는 발상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 게 흠이었다. 사족 하나. 최종 심사 대상 작품의 표절 여부를 검증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했던 씁쓸함!

 

  

2012년 불교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암자에 홀로 앉아 / 박상주

 

날 좀 때려주오

천년고찰 범종 치듯

안으로

다져놓은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

빈 골짝

다 쏟아 붓고

나비 되어 가련다

 

시·시조 심사평 (고은 시인)

청각·시각 대비 살려낸 ‘묘경’

         ‘보시(1)-지렁이’의 담담한 고백체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눈물자국’도 덜 설명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제쳐두기 아까웠다. ‘회화나무’의 단단한 솜씨도 그랬다.

 

‘나를 흔드는 기억들’도 일상의 신산스러움을 냉철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지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세 작품이 시부분 ‘세월에 告함’ ‘분원의 강덴 노을의 소각장이 있다’와 시조부문 ‘암자에 홀로 앉아’였다.

 

  그런데 이것들은 각각 다른 몇편과 함께 보내온 것이어서 그것들을 읽는 동안 그 실력의 속내가 밝혀지는 경험을 했다.결국 시조부문 ‘암자에 홀로 앉아’를 당선작으로 삼았다.

 

  당선작 시조는 종소리와 ‘청태눈물’이라는 청각 시각의 대비를 살려내는 묘경을 이루었다. 다만 ‘때려라’라는 거센 표현이 산사 환경을 작위적이게 했다. 하지만 기승전결이 썩 좋았다. 아쉽게 된 시쪽은 중후한 음조 위에 참신한 언어구사를 한 작품이다. 그러나 한두군데의 휴지부가 거슬리는 현학취미를 자아내고 말았다.

 

  편집국 벗들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면전에 사절하기가 쉽지 않아서 이 심사를 맡았다. 바야흐로 흑룡의 새해 <불교신문> 창간시대의 인연을 떠올리며 낯선 선자가 되어 보았다.낙선의 작자들은 더 연마하기 바라고 당선자는 이번의 수준을 뛰어넘는 내일을 지향하기 바란다. 산중이 진언 ‘향상일로(向上一路)’가 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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