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1960~1989)
1960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도에서 3남 4녀중 막내로 출생
1967 시흥국민학교에 입학
1979 신림중학교을 거쳐 중앙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
연세대학교 정법대 정법계열 입학, 교내 문학동아리 '연세문학회'에 입회
1980 대학문학상인 박영준 문학상(소설부문)에 당선없는 가작으로 입선바람
1981 방위병으로 입대, 복무중 안양의 문학동인인 '수리'에 참여.
동인지에 '사강리'등 발표, 시작에 몰두
1982 6월 전역후 다수의 작품을 쓰며, 대학문학상인 윤동주문학상(시부문)에 당선
1984 10월 중앙일보사에 입사
198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안개')되어 문예지에 시 발표하기 시작
2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신문사 수습을 거쳐 정치부에 배속
1986 정치부에서 문화부로 옮김. 지속적으로 작품을 발표 주목을 받음
1988 문화부에서 편집부로 옮김. 여행등을 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
1989 가을에 시집출간을 위해 준비하다 3월 7일 새벽, 종로의 한 극장 안에서
숨진 채 발견
사인은 뇌졸중 만 29세, 독신,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수원교구묘지에 묻힘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발간
1989년 5월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90년 3월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살림출판사)
1994년 2월 추모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출판사)
1999년 3월 전집 '기형도 전집'(문학과지성사)
이 쓸쓸함은......
누구였을까
直線(직선)의 슬픔같이
짧은 밤 簡易驛(간이역) 號角(호각)소리 같이
한 사나이가 비밀처럼 지나갔다.
상관없는 일이다. 1981년 平凡(평범)한 가을
목 쉰 불빛 몇 점
구겨진 마른 수건처럼 쓸쓸한 얼굴
내가 그를 지나쳤다
불빛 가운데 새하얀 생선 가시
몇 개로 떠 있는 나무
軍服(군복)의 외로운 角(각)짐.
상관없는 일이다. 1981년 平凡(평범)한 가을
쿵, 쿵, 쿵, 쿵
그런데 누구였을까
외투도 없이 얼핏
쉼표처럼 漠漠(막막)한 이 쓸쓸함은...
우리는 그 긴 겨울의 통로를 비집고 들어갔다
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통로)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겨울이다. 자네가 바라던 대로
하늘에는 온통 먹물처럼 꿈꾼 흔적뿐이다.
눈(雪)의 실밥이 흩어지는 空中(공중) 한가운데서
타다 만 휴지처럼 한 무더기 죽은 새(鳥)들이 떨어져 내리고
마을 한가운데에선
간혹씩 몇 발 처연한 총성이 울리었다
아무도 豫言(예언)하려 하지 않는 時間(시간)은
밤새 世上(세상)의 낮은 울타리를 타넘어 추운 벌판을 홀로 뒹굴다가
몽환의 빗질로 우리의 차가운 이마를 쓰다듬고
저 혼자 우리의 記憶(기억) 속에서 달아났다.
알 수 있을까, 자네
꿈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굳게 빗장을 건 얼음판 위에서 조용한 깃발이 되어
둥둥 떠올라 타오르다 사라지는 몇 장 불의 냉각을
오, 또 하나의 긴 거리, 가스등 희미한 내 기억의 迷路(미로)를
날아다니는 외투 하나만큼의 허전함.
겨울 오후 3시, 그 휘청휘청한 권태의 비탈
텅 빈 서랍 속에 빛나는 압핀 한 개
춥죠? 음. ……춥군. 그런데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리하여 水平(수평)으로 쓰러지는 한 컵의 물. 한 컵 빛의 悲鳴(비명).
잠자는 물. 그 빛나는 죽음. 얼음의 꿈. 토막토막 끊어지는 秒針(초침).
우리는 世上과 타협하지 않는 최후의 무리였다.
모든 꿈이 소멸된 지상에 홀로 남아
두꺼운 외투와 커피 한 잔으로
겨울을 정복하는 꿈을 꾼다.
춥죠? 음. ……춥군. 그런데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거리를 한 개 끈으로 뛰어다닐 때의 해질 무렵
건물마다 새파랗게 빛나는 면도 자국.
이것이 희망인가 절망일 건가 불빛 속에서
낮게 낮게 솟아오르는 중얼거림
깨지 못하는 꿈은 꿈이 아니다. 미리 깨어 있는 꿈은 悲劇(비극)이다.
鋪道(포도) 위에 고딕으로 반사되는 발자국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희미한 음향을
듣는가 자네 아직도 꿈꾸며
우리는 그 긴 겨울의 通路(통로)를 비집고 걸어갔다.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부르기 싫은 노래를 억지로 부르듯
黑人가수의 노래가 천천히
탁자에는 시든 꽃 푸른 꽃 위에는 램프
어두웠다 벽면에 긴 팽이모자를 쓴
붉고 푸른 가면들이 춤추며
액자 때문은 아니었다
예감이라도 했던들 누군가
나를 귀찮게 했던들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나는 大學生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가끔씩 어떤 홀연한 계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全靑春이
한꺼번에 허물어져버린 것 같은
슬픔을 맛볼 때가 있듯이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쓰러졌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오래된 書籍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입 속의 검은 잎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끔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 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봄날은 간다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그림자들은
한 장 熱風에 말려 둥글게 휘어지는구나
아무 때나 손을 흔드는
미루나무 얕은 그늘 속을 첨벙이며
2시반 시외버스도 떠난 지 오래인데
아까부터 서울집 툇마루에 앉은 여자
외상값처럼 밀려드는 대낮
신작로 위에는 흙먼지, 더러운 비닐들
빈 들판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연기들은
어느 쓸쓸한 풀잎의 자손들일까
밤마다 숱한 나무젓가락들은 두 쪽으로 갈라지고
사내들은 화투패마냥 모여들어 또 그렇게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간다
여자가 속옷을 헹구는 시냇가엔
하룻밤새 없어져버린 풀꽃들
다시 흘러들어온 것들의 人事
흐린 알전구 아래 엉망으로 취한 군인은
몇 해 전 누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자는
자신의 생을 계산하지 못한다.
몇 번인가 아이를 지울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릴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추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小邑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세숫대야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봄날이 가면 그뿐
宿醉는 몇 장 紙錢 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흙먼지들은
굳은 땅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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