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아래서
-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외할머니
- 나태주
시방도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외할머니는
손자들이
오나오나 해서
흰옷 입고 흰버선 신고
조마조마
고목나무 아래
오두막집에서
손자들이 오면 주려고
물렁감도 따다 놓으시고
상수리묵도 쑤어 두시고
오나오나 해서
고갯마루에 올라
들길을 보며.
조마조마 혼자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시방도 언덕에 서서만 계실 것이다,
흰옷 입은 외할머니는.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 나태주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밤 사이 내려와 놀던 초록별들의
퍼렇게 멍든 날개쭉지가 떨어져 있다.
어린 날 뒤울안에서
매 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찌꺼기가
비칠비칠 아직도 거기
남아 빛나고 있다.
심청이네집 심청이
빌어먹으러 나가고
심 봉사 혼자 앉아
날무처럼 끄들끄들 졸고 있는 툇마루 끝에
개다리소반 위 비인 상사발에
마음만 부자로 쌓여 주던 그 햇살이
다시 눈트고 있다, 다시 눈트고 있다.
장 승상네 참대밭의 우레 소리도
다시 무너져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내 어린 날 여름 냇가에서
손바닥 벌려 잡다 놓쳐 버린
발가벗은 햇살의 그 반쪽이
앞질러 달려와서 기다리며
저 혼자 심심해 반짝이고 있다.
저 혼자 심심해 물구나무 서 보이고 있다
상수리나뭇잎 떨어진 숲으로
- 나태주
오뉴월에 껴 입은 옷들을 거의 다 벗어가는 그대여.
가자, 가자.
나도 거의 다 입은 옷 벗어가니
상수리나무 나뭇잎 떨어져 쌓인 상수리나무 숲으로
칡순같이 얽혀진 손을 서로 비비며.
와삭와삭 돌아눕는 낙엽 아래
그 동안 많이도 잃어진 천국의 샘물을 찾으러,
가으내 머리 감을 때마닥
뽑혀나간 머리카락들을 찾으러.
가자, 가자,
마지막 남은 옷들을 벗기 위하여
상수리 나뭇잎 떨어진 상수리나무 숲으로
이젠 뼈바디만 남은
열개 스무개 발가락들 서로 비비며.
열개 스무개 마음의 뼈마디들 서로 비비며.
다시 산에 와서
- 나태주
세상에 그 흔한 눈물
세상에 그 많은 이별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으로 다시 와
정정한 소나무 아래 터를 잡고
둥그런 무덤으로 누워
억새풀이나 기르며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앉아 있으리.
멧새며 소쩍새 같은 것들이 와서 울어주는 곳,
그들의 애인들꺼정 데불고 와서 지저귀는
햇볕이 천년을 느을 고르게 비추는 곳쯤에 와서
밤마다 내리는 이슬과 서리를 마다하지 않으리.
길길이 쌓이는 壯雪을 또한 탓하지 않으리.
내 이승에서 빚진 마음들을 모두 갚게 되는 날,
너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백발로 졸업하게 되는 날
갈꽃 핀 등성이 너머
네가 웃으며 내게 온다 해도
하낫도 마음 설레일 것 없고
하낫도 네게 들려줄 얘기 이제 내게 없으니
너를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숫제 말하지 않으리.
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
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에 다시 와서
싱그런 나무들 옆에
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을 이웃하여
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의 밤을 싫다하지 않으리.
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나 외우고 있으리.
멀리까지 보이는 날
- 나태주
숨을 들이쉰다.
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
한 그루가 끌려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
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
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 사르락
작은 바다 물결 소리까지
끌려들어온다.
숨을 내어 쉰다.
뻐꾸기 울음소리
꾀꼬리 울음소리가
쓸려 나아간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쉰다.
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
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
쓸려 나아가고 조그만 산 하나
다가와 우뚝 선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 저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
뛰어 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내가 사랑하는 계절
-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
11월이다
더 여유 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깨금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
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시제時祭 지내러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봉송封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
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둥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굴품한 : <배가 고픈 듯한>, <시장기가 드는 듯한>의 충청도 방언
산촌 엽서
- 나태주
고개
고개 넘으면
청산
청산
봉우리에 두둥실
향기론 구름
또닥또닥
굴피 너와집에
칼도마소리
볼이
붉은 그 아이
산처녀 그 아이
산제비꽃 옆
산제비꽃 되어
사네
산벚꽃 옆
산벚꽃 되어
늙네.
초등학교 선생님
- 나태주
아이들 몽당연필이나
깎아 주면서
아이들 철없는 인사나 받아 가면서
한 세상 억울한 생각도 없이
살다 갈 수만 있다면
시골 아이들 손톱이나 깎아 주면서
때 묻고 흙 묻은 발이나
씻어 주면서 그렇게
살다 갈 수만 있다면.
뒷모습
- 나태주
뒷모습이 어여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자기의 눈으로는 결코
확인이 되지 않는 뒷모습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뒷모습은
고칠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물소리에게도 뒷모습이 있을까?
시드는 노루발풀꽃, 솔바람소리,
찌르레기 울음소리에게도
뒷모습은 있을까?
저기 저
가문비나무 윤노리나무 사이
산길을 내려가는
야윈 슬픔의 어깨가
희고도 푸르다
눈부신 속살
- 나태주
담장 위에 호박고지 가을볕 좋다
짜랑짜랑 소리 날 듯 가을볕 좋다
주인 잠시 집 비우고 외출한 사이
집 지키는 호박고지 새하얀 속살
눈부신 그 속살에
축복 있으라.
서울, 하이에나
- 나태주
결코 사냥하지 않는다
먹다 남은 고기를 훔치고
썩은 고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찌 고기를 훔치는 발톱이
고독을 안다 하겠는가?
썩은 고기를 찢는 이빨이
슬픔을 어찌 안다고 말하겠는가?
딸아, 사냥하기 싫거든
차라리 서울서
굶다가 죽어라.
지상에서의 며칠
- 나태주
때 절은 종이 창문 흐릿한 달빛 한 줌이었다가
바람 부는 들판의 키 큰 미루나무 잔가지 흔드는 사람이었다가
차마 소낙비일 수 있었을까?
겨우 옷자락이나 머리칼 적시는 이슬비였다가
기약 없이 찾아든 바닷가 민박집 문지방까지 밀려와
칭얼대는 파도소리였다가
누군들 안 그러랴
잠시 머물고 떠나는 지상에서의 며칠, 이런 저런 일들
좋았노라 슬펐노라 고달팠노라
그대 만나 잠시 가슴 부풀고 설렜었지
그리고는 오래고 긴 적막과 애달픔과 기다림이 거기 있었지
가는 여름 새끼손톱에 스며든 봉숭아 빠알간 물감이었다가
잘려 나간 손톱조각에 어른대는 첫눈이었다가
눈물이 고여서였을까?
눈썹 깜짝이다가 눈썹 두어 번 깜짝이다가......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 나 태주
전화 걸면 날마다
어디 있냐고 무엇 하냐고
누구와 있냐고 또 별일 없냐고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묻고 또 묻는다
허기는 아침에 일어나
햇빛이 부신걸로 보아
밤사이 별일 없기는 없었는가 보다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
천천히 가는 시계
- 나태주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 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인제는 나도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며 살고 싶다.
좋은 약
- 나태주
큰 병 얻어 중환자실에 널부러져 있을 때
아버지 절룩거리는 두 다리로
지팡이 짚고 어렵사리 면회 오시어
한 말씀, 하시었다
얘야, 너는 어려서부터
몸은 약했지만 독한 아이였다
네 독한 마음으로 부디 병을 이기고 나오너라
세상은 아직도 징글징글하도록 좋은 곳이란다
아버지 말씀이 약이 되었다
두 번째 말씀이 더욱
좋은 약이 되었다.
▶나태주 :
• 1945년 3월 17일 충남 서천 출생
• 1963년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후에 한국방송통신대학과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43년 3개월 동안 근무하다가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마지막 직장으로 정년 퇴임(2007년, 황조근정훈장 받음)
•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시인으로 데뷔(박목월, 박남수 선생 심사) 시 당선
• 시집 : 1973년 첫 시집『대숲 아래서』출간 이후 여러 권의 시집 출간(2시집『누님의 가을』, 3시집『막동리 소묘』, 4시집『사랑이여 조그만 사랑이여』, 5시집『변방』, 6시집『구름이여, 꿈꾸는 구름이여』, 7시집『굴뚝각시』, 8시집『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 9시집『목숨의 비늘 하나』, 10시집『아버지를 찾습니다』, 11시집『그대 지키는 나의 등불』, 12시집『추억이 손짓하거든』, 13시집『딸을 위하여』, 14시집『두 마리 학고 같이』, 15시집『훔쳐보는 얼굴이 아름답다』, 16시집『눈물난다』, 17시집『지는 해가 눈에 부시다』, 18시집『나는 파리에 가서도 향수를 사지 않았다』, 19시집『천지여, 천지여』, 20시집『풀잎 속 작은 길』, 21시집『슬픔에 손목 잡혀』, 22시집『섬을 건너다보는 자리』, 23시집『산촌엽서』, 24시집『이 세상 모든 사랑』, 25시집『쪼끔은 보랏빛으로 물들 때』, 26시집『물고기와 만나다』, 27시집『꽃이 되어 새가 되어』, 28시집『눈부신 속살』등
• 선시집 : 『빈손의 노래』,『추억의 묶음』,『손바닥에 쓴 서정시』,『네 생각 하나로 날이 저문다』,『슬픈 젊은 날』,『나의 등불도 애달프다』,『하늘의 서쪽』,『너도 그렇다』등.
• 시화집 : 『사랑하는 마음 내게 있어도』,『너도 그렇다』등
• 사진시집 : 『비단강을 건너다』(김혜식 사진) 출간
• 동화집 :『외톨이』출간
• 산문집 : 『외할머니랑 소쩍새랑』,『추억이 말하게 하라』,『쓸쓸한 서정시인』,『시골사람 시골 선생님』,『아내와 여자,』『꽃을 던지다』,『공주, 멀리 보이는 풍경』등
• 합동시집집 :『모음』(구재기, 권선옥),『별 아래 잠든 시인』(송수권, 이성선)
• 『나태주 시 전집』(4권 2006년, 서울: 고요아침) 출간
• 문단 활동 : 충남문인협회 회장, 공주문인협회 회장, 충남시인협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장 등 역임, <새여울> 동인, <금강시마을> 회원
• 수상 : 흙의문학상, 충천남도문화상, 현대불교문학상, 박용래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등
• 현주소 : 314-080 충남 공주시 금학동 187. 대일아파트 3동 903호
• 이메일 : tj4503@naver.com
• 현재 : 공주문화원장으로 일하고 있음(2009년 7월 1일부터)
• 가족사항 : 아내 김성예金成禮, 1973년 혼인
아들 나병윤羅炳允, 1977년 출생(2009년 유수정兪受定과 성가)
딸 나민애羅民愛, 1979년 출생(2003년 최성우崔盛宇와 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