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 내리는 날
함박눈 내리는 날 모든 죽음 위에
모든 죽음 뒤 남아있는 이삭의 삶 위에
함박눈 내리는 날
너를 만나
네 옷에 쌓인 눈을 털어주며
너에게 말하고 싶다
아 금지당한 말로 말하고 싶다
이제까지 내 세월에 흔전만전 허여된 말이 아닌
얼치기 지배의 말
얼치기 관습의 말이 아닌
몇 백년 동안
몰래몰래
목숨 걸고 이어져 온
그 금지 당한 말이
참을 수 없이
내 입술 밖으로 뛰쳐나와
깜짝 놀라는 네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그말로 말하고 싶다
아랑한다고!
사랑한다고가 아닌
아랑한다고!
저쪽 상수리나무 가지마다 쌓인
무거운 눈을
누가 털어준다
나뭇가지들이 출렁이다 말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랑한다고!
봉정암
설악 봉정암이다
한 바가지 샘물 떠 마셨다
저 아래를 슴벅 내려다 보았다
백팔번뇌야
백팔번뇌야
너희들이 나를 살려왔구나
이제 내려가도 되겠다
어청도 바다 앞에서
비로소 나는 전체이다
한 발자국도
불러설 수 없는
더 이상 불기운이 남아있지 않는
타버린 잿더미 소락소락
날려 보낼 바람 한자락도
일지 않는
내 무능으로부터 이제 막 전능이 뱃속에서 빠져나왔다
회한 가라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깃발이 된다
나보다
네가 먼저 깃발이 된다
아니
지상의 나무보다
지하의 뿌리들이
먼저 깃발이 된다
그 뒤로 해질녘 새떼들이 깃발이 된다
거의 다마른 빨래들도
네 머리칼도
한오리 거짓 없이
이미 깃발이다
저 바다 밑
칠흑 심해 수압 속
너훌너훌 춤추는 고기들의 자유가
남 모르는 깃발 아니고 무엇이냐
바람이 불면
내 가슴 깊은 응어리들 뛰쳐나와
서두르는 환희가 된다
아니 추락조차
내 비상이다
비상의 깃발이다
구름의 깃발이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면
모든 것 밖의 모든 것
기어이 깃발이 되고 만다
바라람이 불면
바람이 되기 전에
먼저
어느 임종 어느 탄생이 된다
바람이 불면
모든것이 깃발이 된다 깃발이 되어 휘날린다
은행단풍 밑에서
오늘 은행단무 잎새들
불 밝히시누나
호동그랗게
호동그랗게
불 밝히시누나
지난 여름
그 얼마나 묵묵히 시련의 날들이었뇨
은행 잎새 사이사이
눈뜬 벽공碧空 조각
그 얼마나 생나무 타는 인내의 밤이었느뇨
나는 가던 길을 더 못가고 만다
구름을 보라
이렇게 밖에 못 살았구나
아홉 살 때
할머님 돌아가셨다
열일곱 살 때
외할머님 돌아가셨다
스믈 한 살 때
왼손잡이 할아버님 술 취한 채 논두렁에서 돌아가셨다
스믈여섯 살 때인가 외할아버님 돌아가셨다
서른 살 때
아버님 돌아가셨다
예순다섯 살 때
어머님 돌아가셨다
일흔다섯 살 때 장모님 담배 세 댓째 피우시다 돌아가셨다
이제 어김없이 내 차례다 구름이 나를 본다 나도 구름너머를 가만히 본다
길을 물어
남원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는 산길
지난해 으악새들 쓸려
으스스히 찬 기운이 감싸온다
나는 멈칫하다가
마음 다독여 마루턱을 그예 넘었다
거기까지 따라오던 찬 기운과 헤어져
내 눈이 그렁그렁 편했다
내리막 길
천 년 전의 어느날
천 년 전의 나인 듯 옛스레 흥얼거렸다
골짝 아래
옹달 샘
그 옹달샘 물 긷는 아낙
딴 세상이다 이 세상이다
나의 길 잘못 들었던가
큼
큼
기척 앞세워
저어 삼송리로 가는 길 아시나요 여쭈었더니
모른다하시더니
잠깐 기다리라 하시더니
잰 걸음으로
아래 쪽 오두막까지 가
그 집 할멈한테 물어물어
돌아와
이길로 가시다가
저 길로 가시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그 삼거리에서
오른쪽 삼밭 쪽 길로 접어들어
한 반 시각쯤이면
6백년짜리 팽나무 밑에 주막이 나오는데
거기가
바로 삼송리 동구라고 알려주셨다
두레박 물도 주시며
갈한 목 축여
하늘을 보니
낮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고마우신지고
내 발가락의 기쁨이 성큼성큼 길을 내었다
아뿔사
1백년 뒤의 자본주의 극단인심에 길을 물을 때 혹시나 돈 몇 푼 받아야
길을 가르쳐 주지 않을까
아뿔사
그럼 1백년 전에 살고 있는 것
순 공짜를 정성들여
길을 가르쳐 주시는 산골 아낙과 함께 살고 있는 것
하늘 아래
하늘의 구름 아래
붉으대대한 저녁노을의 마을
그 삼송리 안동네의 개가 짖는 순한 소리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격월간지 유심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