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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방/詩 공부

창조적 글쓰기

by 미스커피 2011. 11. 15.

창조적 글쓰기


  지금까지 우리는 맞춤법과 띄어쓰기, 그리고 올바른 문장 작성 방법에 대해 학습하면서 

글쓰기를 위한 기본적인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실질적인 글쓰기 방법에 대해 학습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성과 조직성, 그리고 합리성입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요소를 늘 염두에 두면서 글쓰기를 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합시다.



1. 글쓰기 학습에 앞서


  (A) 산제비 울던 고갯길.

      산딸기 피던 고갯길.

      재 너머 감나무골 사는 우리 님.

      휘영청 달이 밝아 오솔길 따라

      오늘 밤도 그리움에 가슴 태우며 나를 찾아

      오시려나 달빛에 젖어.


  (B) 울지 마라 울긴 왜 울어, 그 까짓것 사랑 때문에.

      빗속을 거닐며 추억일랑 던져 버리고

      한 잔 술로 잊어 버려라.

      어차피 인생이란 이별이 아니더냐.

      울지 마라 울긴 왜 울어. 바보처럼 울긴 왜 울어.


  (C)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랑아.

      비 내리는 여름날에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내 여인아.

      잠시라도 떨어져선 못 살 것 같은 내 사랑아.


  위의 글들은 모두 대중가요의 가사입니다. 그 중에는 제법 시적인 것도 있고 더러는 다소 천박하거나 유치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나름대로의 전달효과를 감안하고 지은 글들입니다.

  자, 그럼 우선 (A)와 (B)와 (C)를 한번 살펴봅시다.

  여러분이 보기엔 어떻습니까? 일단 (A)는 유행가 가사라기엔 상당히 시적인 노랫말 같지요? 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잘 담겨 있고 각 행마다 명사로 끝나는 것도 여운을 주어 웬만한 시 이상입니다. 유행가 가사도 이 정도만 되면 누가 유치하다고 하겠습니까. 단, 하나 애매한 것은 화자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다는 점입니다. 대체로 여자로 생각되지만, 나훈아 씨가 불렀기 때문에 남자로 추정해 볼 수도 없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좀 곤란하죠. 여자더러 심야에 험한 고갯길을 넘어오라니 말이 됩니까. 그건 아주 뻔뻔하고 파렴치한 짓이죠. 그러니, 아무리 자신만만해도 여자더러 그러라고 하면 안 됩니다.

  (B)는 우리가 대중가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수준의 가사입니다. 전혀 시적이지도 않고 표현도 다소 유치합니다.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라는 건 너무 상투적이고 모를 사람이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사람은 이 가사를 보고서 말했습니다. 이런 가사라면 자기는 하루에도 수백 개는 짓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의 말은 틀렸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수백 개가 아니라 수천 개라고 해야 옳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가사의 전달 효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C)는 노랫말만으로 볼 땐 (A)와 (B) 의 중간쯤에 있는 것 같습니다. (A)보다는 덜 시적이지만 (B)처럼 유치하지도 않습니다. 나름대로 반복효과가 살아 있는 아름다운 노랫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자칭 타칭 소도둑놈처럼 생겼다는 나훈아 씨가 지은 노랫말이라는 점에선 더욱 말입니다.

  자, 아무튼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세 노래의 정조(情調)의 차이입니다. (A)는 은근하고 (B)는 절규하듯 격정적이며 (C)는 애잔합니다.

  둘째, 그래서인지 (A)와 (C)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간접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B)는 아주 거칠고 직설적입니다.

  아무튼 이 세 노래에서 우리는 경우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글쓰기에 대단한 법칙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와 다릅니다. 위의 노랫말에서 보았던 것처럼 글쓰기도 특별한 법칙이 없습니다. 그저 경우에 따라, 그리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쓰면 되는 것입니다.  



2. 글쓰기에는 특별한 형태와 방식이 없다

  글쓰기는 축구 경기와 같습니다. 축구 경기의 최종 목표는 상대방의 골대 안에 볼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다양한 작전을 짜고 전술을 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전과 전술은 일정한 게 없고 경기마다 다릅니다. 백 번 게임을 해서 백 골을 넣었을 때 그 과정은 한 번도 같은 게 없습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쓰기에도 여러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효과적인 표현과 전달을 위한 방법론의 차이일 뿐 특별하게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글쓰기에는 특별한 형태나 방식이 없는 것입니다.



3. 글쓰기를 위한 다독(多讀)과 다사(多思)와 다작(多作, 多書)

  과거,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대한 고등학교가 남부 지방 어디쯤엔가 있었습니다. 그 학교 교훈이 ‘아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교훈은 인류 최고의 가르침으로 여겨집니다. 과연 그 교훈의 가르침대로 그 학교 졸업생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 나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 교훈의 가르침을 받고서 훌륭한 인재가 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테지요. 알고 생각해서 행하는 사람이 훌륭하지 않으면 대체 어떤 사람이 훌륭할 수 있겠습니까.

  글쓰기를 위해선 우선 많이 읽어야 합니다. 아는 게 많아야 지식인이 되고 쓸 게 생기는 것이죠. 그리고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아는 게 많더라도 그것이 잡다한 지식에 그쳐서는 곤란합니다. 그 지식이 바른 생각으로 정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에 사상이 담길 때 우리는 그것을 지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지성이 머릿속에만 들어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글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다독과 다사와 다작의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글쓰기를 위한 다독과 다사와 다작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 위대한 고등학교의 교훈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다독을 통해 아는 사람이 되고, 다사를 통해 생각하는 사람이 되며 다작을 통해 행하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요.

  결국 다독과 다사와 다작은 글쓰기를 위한 전제조건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간이 되는 길입니다. 이 말은 글쓰기를 잘하는 사람은 훌륭한 인간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림 잘 그리는 화가나 노래 잘 부르는 가수를 선생님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물론 자기들끼리는 간혹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웃기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들을 지식인이나 지성인이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지요. 왜냐하면 지식인 혹은 지성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은 글 잘 쓰는 사람밖엔 없다는 걸 자기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지성인은 글 쓰는 사람밖에 없으며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여러분은 지성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일단 쓰자, 써 보자

  글은 두 가지 경우에 쓰게 됩니다. 즉, 청탁을 받거나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쓰는 경우와 스스로 쓰고 싶어 쓰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선 스스로 쓰는 경우에 대해서만 얘기하겠습니다.

  스스로 글을 쓴다는 것은 삶에 대해서 혹은 인생에 대해서 뭔가 말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럴 땐 이미 소재를 포함한 주제의 모양이 어느 정도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즉, 말하고자 하는 바가 웬만큼 방향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제는 소재를 해석한 통일된 힘이며 그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쓸 땐 ‘뭘 쓰지?’와 ‘어떻게 쓰지?’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뭘 쓰지?’는 소재와 주제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쓰지?’는 그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쓸 것인가 하는 방법론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뭘 쓰든 어떻게 쓰든 일단 글쓰기를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주 글쓰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앞서 우리는 글쓰기가 훌륭한 인간이 되는 길이라는 걸 배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 바로 그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인데, 그렇다면 글쓰기를 게을리 할 이유가 없겠지요.

  ‘무엇을 쓰기’ 위해서는 삶을 부단히 관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제화하기 위해선 관찰한 삶을 해석해야 합니다. 삶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일은 숭고한 일이거니와 글쓰기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쓸 것인가?’는 ‘시작이 반이다’란 말이 있듯이 우리가 글을 쓰려고 했을 때 이미 절반은 해답을 얻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삶을 영위하는 방법’이 우리가 몸소 살아가는 가운데 알게 모르게 체득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노래방 효과’란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시중에 회자되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국내 최초, 세계 최초, 인류 최초, 인류 역사 최초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말이고 반드시 통용되어야 할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노래 실력은 최근 1,20년 사이에 엄청나게 좋아졌습니다. 웬만한 사람 치고 웬만큼 노래 못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노래방 덕분입니다.

  전엔 공개된 장소에서 마이크를 대면 노래를 못 부른다면서 사양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내심으론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던 게 틀림없습니다. 다만, 음정, 박자가 틀릴까봐 선뜻 마이크를 잡을 수 없었던 거지요.

  그러나, 그들도 노래방에서 자주 노래를 부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노래 실력이 향상되었고 또, 마이크를 잡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글쓰기도 그렇습니다. 처음엔 막연하고 또 어렵지만 자꾸 써 보는 가운데 실력이 늘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일단 써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횟수가 거듭될수록 분명 글 솜씨가 놀라울 정도로 달라질 것입니다.



5. 설명할 것인가, 논증(논술)할 것인가? 아니면 서술할 것인가?

다시, 위의 (A)와 (B)와 (C)를 봅시다.

  (B)의 경우 주장이 강합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이별이니까 깨어진 사랑 때문에 울지 말라는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한다면 (C)는 그 내용이 주장이 약해지고 설명조에 가깝니다. 여름날엔 자기 가슴이 우산이 되고 겨울엔 불이 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반면, (A)에는 임이 왜 와야 하는지, 혹은 꼭 와야 하는지 등의 화자의 생각이나 주장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은근하게 서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글이란 그때그때 맞는 글을 쓰면 되는 겁니다. 글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1) 설명적 글쓰기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킬 목적으로 알기 쉽게 풀이하거나 자세히 해명하는 방식의 글쓰기       

   2) 논증적 글쓰기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대한 자기 주장이나 의견을 제시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뒷받침하여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고 동조하도록 설득하는 방식의 글쓰기

   3) 서술적 글쓰기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글로 전개하는 방식의 글쓰기


  따라서, 자신이 표현하거나 전달하려는 내용을 어떤 종류의 글로 하는 게 좋으냐에 하는 것은 글 쓰는 사람이 판단할 몫인 것입니다.



        

6. 글의 구성


   1) 3단 구성과 4단, 5단 구성

  어떤 글을 쓰든 그 글은 전개가 조직적이어야 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주는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글은 대체로 3단 구성 , 4단 구성, 혹은 5단 구성으로 짜여지지만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것으로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도표에서 보듯이 4단 구성이나 5단 구성도 실은 3단 구성의 변화된 형태에 불과합니다.

  보통 3단 구성이라고 하면 논설문, 논문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글이 다 ‘도입부, 몸말, 마무리’를 갖추고 있는 셈이니 결국은 우리가 쓰는 글에 다 적용되는 형식입니다. 물론 이 형식과 순서가 글대로 지켜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글엔 특정한 유형이나 양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3단 구성

   4단 구성

    5단 구성

     서론

      기

      발단

     본론

      승

      전

      전개

      위기

      절정

     결론

      결

      결말


   2) 두괄식과 양괄식과 미괄식

  글을 구성하는 방식엔 3단, 혹은 4단 5단 구성 외에 두괄식과 양괄식, 미괄 식 같은 방식도 있습니다.

  두괄식은 주제문이 글의 첫머리에 나오는 형식입니다. 두괄식의 장점은 첫머리만 읽더라도 글의 방향이나 맥락을 짚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미괄식은 증거나 사례를 미리 제시하고 나중에 글의 결론을 짓는 방식입니다. 제시하는 사례나 정보가 유용하고 참신할 때 사용하는 것이 좋지요.


    남자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은 괜히 우는 게 아냐.

    너 하나 사랑한 게 바보라서 울었다.

    남자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남자는 여자의, 여자는 남자의 사랑 먹고 살아요.

    지난 것은 무효야. 이제부터 시작이야. 다시 한번 돌아서서 웃어봐.


  그리고 양괄식은 주제문이 글의 시작 부분과 끝부분에 함께 나타나는 형식의 글입니다. 처음 제시한 주제를 뒷받침하는 글을 통해 충분히 논의한 다음,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마무리하는 형식의 글입니다.


    울지 마라 울긴 왜 울어, 그 까짓것 사랑 때문에.

         빗속을 거닐며 추억일랑 던져 버리고

         한 잔 술로 잊어 버려라.

         어차피 인생이란 이별이 아니더냐.

         울지 마라 울긴 왜 울어. 바보처럼 울긴 왜 울어.


   3) 연역법과 귀납법

  연역법과 귀납법은 글을 구성하는 데 있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쓰입니다.


      (1) 연역법

일반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개별적이거나 특수한 사실, 원리를 이끌어내는 논증 방식.

  대전제: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전제: 공주는 사람이다.

  결  론: 공주는 죽는다.(당근. 안 죽고 못 배기지.)


  대전제: 정의는 승리한다.(맞는 말인데? 아니, 맞는 말이어야 되는데......)

  소전제: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다.(그렇다고 쳐도)

  결  론: 나는 승리한다.(아닐 수도 있지.)


  대전제: 용모보다 중요한 건 마음씨다.(말은 그렇게들 하지.)

  소전제: 너는 마음씨가 착하다.(착하지도 않다면 큰일이게?))

  결  론: 너는 시집 잘 갈 것이다.(아마 아닐 걸.)


      (2) 귀납법

  특수한 사실이나 개별적인 현상들을 모아서 일반적인 원리를 추출해 내는 논증 방식.


전제 1: 곤충, 짐승, 새, 물고기 등은 다 죽는다.

  전제 2: 곤충, 짐승, 새, 물고기 등은 다 생물이다.

  결  론: 모든 생물은 다 죽는다.(당근.)

 

  전제 1: 곤충, 짐승, 새, 물고기 등은 다 알을 낳는다.

  전제 2: 곤충, 짐승, 새, 물고기 등은 다 생물이다.

  결  론: 모든 생물은 다 알을 낳는다.(짐승도?)








7. 창조적 글쓰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이 창조를 통해 인류 문화와 문명은 발전해 왔습니다. 따라서, 글쓰기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형식도 그렇고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나 뻔한 이야기라면 굳이 다시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창조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입니다. 따라서, 글쓰기에서도 상상력은 매우 중요한 덕목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상상도 조직적으로 전개되어야 하고 합리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1) 쥘 베른의 잠수함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잠수함은 백여 년 전 활동했던 프랑스 작가 쥘 베른에 의해서 처음 고안된 것입니다. ‘해저 2만리’란 소설에서 그는 순전히 상상력만으로 ‘노틸러스 호’라는 바다 속을 항해하는 배를 창안해 냈던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미국에서 핵잠수함을 건조했을 때 ‘노틸러스’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공상과학을 다룬 쥘 베른의 작품은 그 외에도 많습니다만 후에 실제로 응용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상상력이 실현가능성에서 출발했고 또 상당수가 실현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외국의 어떤 문화학자가 1960년대를 정의하면서 ‘비틀즈와 제임스 본드’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비틀즈에 대한 얘기를 잠시 보류한다면 007 제임스 본드가 현대 문명이나 문화에 기친 영향은 실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처음 나온 007 영화가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리즈로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영화적 흥미 차원에서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007 영화의 등장이 문화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아마도 ‘첨단과학의 생활화’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아직 일반화되기 전의 컴퓨터, 핸드폰, 멀티미디어 등의 기기가 수십 년 전인 60년대 초반에 영화에선 이미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쥘 베른의 잠수함이나 이언 프레밍이 탄생시킨 제임스 본드가 사용하는 첨단기기는 모두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2) 양녕대군 이야기

  최근 TV 드라마에서 세종대왕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드라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녕대군의 실체 때문입니다.

  초등학교에서 우리는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 양녕대군이 자신보다 셋째인 충녕대군이 왕의 자질이 더 뛰어나다는 걸 알고 왕위를 사양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 중의 일부는 더러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정말 순순히, 자의적으로 사양했을까, 혹시 강압적이거나 마지못했던 부분은 없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왕이 되고 싶어 하고 또, 그것은 쉽게 사양하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못 나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실제로 태종 이방원은 왕이 되기 위해서 형제들과 싸웠고 마침내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인조 임금도 맏아들인 소현세자가 자기 왕위를 넘보는가 싶어 죽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양녕대군이 동생에게 왕위계승권을 사양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믿기 힘듭니다. 말하자면 논리적 뒷받침이 빈약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양녕대군의 왕위 사양설에서 심히 우려되는 것은 그로 인해 상식적인 사고활동조차 봉쇄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즉, 그것이 훈훈한 형제애를 강조한 것이긴 하겠지만 건전한 사고와 분석, 비판 능력을 방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는 것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바람직한 일이 될 것입니다. 창조는 고정된 관념을 뛰어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3) ‘진달래꽃’ 다시 읽기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싫다고 간다는데 군소리 할 필요 없지. 치사하게 매달린다는 것은 더욱 우습고.)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솔직히 나도 좀 지겨웠거든. 그래, 위자료라도 줘야 할 판에 꽃 몇 송이쯤이           야......)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사실 고맙지 뭐유. 떠나 준다니. 그러니 애써 축복 못할 바도 아니지.)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울긴 왜 울어. 신나서 죽을 판인데. 세계는 넓고 여(남)자는 많다잖아.)


 

8. 글쓰기에서 유념할 몇 가지 사항들


  1) 문체는 사람이다.

  우리는 앞서 글쓰기가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라고 이미 배웠습니다. 그 첫 번째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익히는 단계이고 두 번째는 올바른 문장을 만드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그 두 과정을 기초로 해서 자기만의 개성적인 글을 쓰게 됩니다.

  가수에겐 그 가수 특유의 아우라가 있습니다. 그 아우라는 그 가수만이 구사하는 음색과 창법이 주가 되겠지요. 그리고 가수니까 무대 매너, 제스츄어까지도 포함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노래만 들으면 ‘아하, 이건 누구 노래구나’ 하는 것을 단번에 알게 됩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글을 읽으면 이게 누가 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글엔 글쓴이 고유의 색깔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색깔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가늠할 요소는 여러 가지가 되겠지만 첫째는 문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익히고 문법에 틀리지 않는 문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글쓰기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자신의 문체를 확립하는 일입니다. 글쓰기에서 문체란 가수에 있어서의 음색과 창법을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문체는 글쓴이 고유의 서술방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내용을 서술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즉, 서술방식까지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다른 서술방식으로 이루어진 글을 우리는 문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문체는 글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자기만의 문체를 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최종 목표로 삼는 개성적인 글쓰기도 바로 이 문체를 확립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2) 묘사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자.

  우리는 가끔 얼굴에 화장품을 떡칠한 여자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볼 때마다 약간의 혐오감을 느끼면서 그 여자의 본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으면 성의가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지나친 화장을 하면 마치 가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진실해 보이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당연히 적당한 화장이 좋습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글을 쓰면서 가끔 묘사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게 됩니다. 즉, 묘사를 해야 문장이 멋있지 않을까 하고요. 물론입니다. 우리가 옷을 차려 입으면서 장신구를 부착하는 것처럼 글도 수식어를 사용해서 꾸며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장신구는 보조적인 것이고 수식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글쓰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이고 묘사는 부차적인 작업입니다.

  따라서, 묘사에 있어 다음과 같은 점을 유념했으면 합니다.


      (1) 부정당한 묘사를 하지 말 것

  부적당한 묘사란 묘사를 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묘사를 하는 경우입니다. 부적당한 묘사를 하게 되는 것은 묘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때문입니다.

       

  (A) 비 오는 달밤에 / 나무 없는 그림자에 / 둘이서 홀로 앉아 / 말없이 속삭였다. 

  (B) 제트기가 / 프로펠러 소리를 / 요란하게 내면서 / 남쪽으로 날아갔다.


  위의 예문 (A)에서 비 오는 날엔 달이 뜨지 않으며 나무가 없으면 당연히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면 ‘둘이 앉아’가 맞고 말이 없었다면 침묵한 거죠.

  그리고 (B)에서도 제트기는 프로펠러가 없습니다.


      (2) 상투적인 묘사를 하지 말 것

  상투적인 묘사란 그 묘사가 이미 전형화되어서 더 이상 묘사로서의 신선함이 없어진 경우를 말합니다. 이럴 경우 다시 새롭고 참신한 묘사를 찾거나 아니면 하지 맙시다. 다음과 같은 경우가 상투적인 묘사에 해당됩니다.

       

  앵두 같은 입술(입술이라고 모두 앵두 같지는 않음. 거머리 같은 입술도 있음))

  별빛 같은 눈동자(눈동자라고 모두 별빛 같지는 않음. 독사 같은 눈동자 있음) 

  보름달처럼 환한 미소(달맞이꽃처럼 조용한 미소도 있음)

  복사꽃 같은 뺨(물미역처럼 푸른 뺨도 있음)

  신선한 충격(충격이면 무조건 신선한가? 신선한 게 얼마나 된다구?)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고무줄, 새끼줄 같은 머리카락)


      (3) 과장된 묘사를 하지 말 것


  알랭 들롱만큼 잘 생긴 아이들이 우리 반엔 많다.(알랭 들롱만큼? 거짓말!) 

  우리 반엔 놈현스러운 녀석들이 많다.(그럼 큰일이게?)

  걔가 백 배는 더 낫다.


   3) 쓸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좋은 교수는 두 시간의 강의를 위해 열 시간의 준비를 합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모두 글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쓸 것보다는 더 많이 알아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땐 그 내용과 직결되는 것은 물론 연관되는 지식도 폭넓게 구해 둡시다.


   4) 굳이 긴 문장의 글을 쓰지는 말자.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의 글을 쓰려다 보면 문장이 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문장이 길면 단문보다 멋있고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긴 문장은 자칫 틀리는 문장이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멋있는 것보다 틀리지 않는 게 문장에선 중요합니다. 따라서, 긴 문장을 잘 쓸 자신이 없다면 가급적 짧은 문장을 씁시다. 짧은 문장도 잘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간편한 옷으로 멋을 내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로 말입니다. 그러니 짧은 문장을 정확하게 쓰는 것부터 연습합시다.


   5) 중복되는 단어나 표현 혹은 내용은 가급적 피하라.

      (1) 한 문장에서 같은 단어는 될 수 있는 한 쓰지 말자.

  그다지 길지 않은 한 문장 안에서 같은 단어를 쓴다는 것은 어휘력이 빈곤하게 보일 뿐더러 모양새도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2) 같은 표현도 될 수 있는 한 삼가자.

  같은 표현도 마찬가집니다. 이를테면 ‘부챗살 같은 아침 햇살’은 신선한 표현이지만 방금 쓰고 또 쓰면 신선도가 떨어집니다. 표현력이 빈곤하다고 여겨지는 것도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표현법을 기르는 게 좋습니다.

      (3) 중언부언 하지 말자.

  어떤 교수가 참고하겠다면서 다른 교수의 글을 가져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완성시켰다는 글을 보니 엉망이었습니다. 자기 글에다 다른 교수의 글을 군데군데 붙여 짜깁기하였는데 같은 얘기가 앞에도 나오고 중간에도 나오고 뒤에도 나오는 등 산만하기가 짝이 없었던 겁니다. 동시에 글을 빌려준 교수는 자신의 글이 무참하게 난도질당한 것 같아 가슴이 몹시 쓰렸습니다.

  세상에 제일 매력 없는 사람 중의 하나가 했던 얘기 또 하는 사람입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한 얘기를 뒤에서 또 하고 있으면 짜증이 납니다.

  글을 쓰면서는 중언부언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글에 대한 전반적인 구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결말지어야겠다는 구체적인 생각도 없었던 것입니다.

  글의 전개와 발전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일정한 흐름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내용은 어디쯤에서 서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연 해결됩니다.


   6) 너무 어렵게 쓰지 말자.

 

  (1) 쉽게 표현하고 전달하도록 노력하자.

  가끔 우리는 TV 같은 데서 지나치게 어려운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특히 교수 같은 자칭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잘 쓰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저 사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문학평론가란 사람들도 써 놓은 글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나 소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써 놓은 글이란 게 의미를 배배꼬아 놓은 게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어렵게 말을 해야 자신의 무식함이 드러나지 않거나 자신을 유식한 사람으로 인정해 줄 거라고 오해하고 있는 열등감 많은 사람이 그들입니다.

  둘째는 사물이나 사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교사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사상의 위대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모든 걸 쉽게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물이나 사안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어야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좋은 글을 쓰려면 사물이나 사안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쉽게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노력을 합시다.


     (2) 한문투, 번역투의 문장은 피하자. 한자어와 영어도 가급적 피하자.

  가끔 우리는 주변에서 지나치게 한문투, 번역투의 말을 하거나 한자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이나 글은 바람직한 게 못 됩니다.

  가령, ‘결재를 득하고’라든가 ‘-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위의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가소롭고 혐오스럽지요. 멀쩡한 우리말을 놔 두고 ‘득하는’ 게 뭡니까. 그냥 ‘결재를 얻어서’ 혹은 ‘결재를 맡아서’라고 하면 어디가 덧납니까. 그리고 ‘매우 중요하다’ 하면 될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가 뭡니까. 말장난하는 겁니까.

  더욱이 말끝마다 ‘앱설루트(absollute)!’ ‘엑셀란트해’ ‘샤프하게’ ‘쿨하게’ ‘디테일하게’ 따위의 말을 쓰는 사람을 보면 짜증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요. 그런 말을 써서 문장을 만들면 그 문장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인간들일수록 한글날을 공휴일로 하자고 입에 거품을 물지요.

  쉽게 씁시다. 쉽게 쓰면서 아름다운 우리말로 문장을 만드는 습관을 기릅시다. 


      (3) 부득이한 외국어 표기는 외워 둡시다.

  인명이나 지명처럼 부득이하게 외국어로 쓸 수밖에 없는 단어는 그 표기법을 외워 둡시다. 그러나, 일부러 수고를 하면서까지 외우지는 맙시다. 틀려도 그만이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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