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를 너무좋아해서 임보라고 한답니다.
임보 ∞ 본명 姜洪基
∞ 1962년 서울대학교 국문과 졸업.
∞ 1988년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시운율연구'
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1962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등단했으며,
∞ 시집에
『임보의 시들 · 59-74』 『山房動動』 『木馬日記』,
『은수달 사냥』, 『황소의 뿔』, 『날아가는 은빛 연못』,
『겨울, 하늘소의 춤』『구름 위의 다락마을』
『운주천불』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2002)
∞ 시론집
『현대시 운율 구조론』『엄살의 시학』등이 있다.
∞ 현재
〈진단시〉 및 〈牛耳洞 詩人들〉 동인이며
충북 대학교 인문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2004. 2.
<문학의 즐거움> 자문위원
기승전결의 사단 구조
세상의 모든 일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의 중간이 그 일의 진행 과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시작, 중간, 끝의 3단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진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논문의 구조를 얘기할 때 서론 본론 결론 하는 것이 바로 이 3단 구조입니다.
그런데 글이란 것도 세상의 일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그 진행 과정에 우여곡절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래서 그 '중간' 부분이 다시 2단계, 3단계 혹은 4단계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장편 소설이나 희곡의 전개 과정을 놓고
발단(시작)→ 전개→ 갈등→ 위기→ 절정→ 종말(끝) 등으로 논하지 않습니까?
이 경우는 중간 부분을 4단계(전개, 갈등, 위기, 절정)로 다시 나눈 것이 됩니다.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하나의 이미지만을 제시하는 단단(單段, 1단) 구조로부터
시작과 끝만을 지닌 2단 구조 그리고 3, 4, 5단 등 다양한 구조를 지닙니다.
그런데 우리 시에서 압도적으로 선호되고 있는 구조는 4단 구조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기(起) 승(承) 전(轉) 결(結)의 4단계를 지닌
한시(漢詩) 절구(絶句)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구의 영향을 받기 이전인 우리의 고대시가
「구지가(龜旨歌)」나 「황조가(黃鳥歌)」같은 노래들이
4단 구조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나는 그 요인을 사계(四季)의 변화가 뚜렷한 온대의 기후풍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즉 4계의 변화에 오래 적응하다 보니 4단계의 전환 구조에 친숙하게 된 것도 같습니다.
,
이유야 어떻든,
홀수보다는 짝수가 그리고 3각형보다는 4각형이 안정감을 줍니다.
시에서의 4단 전개가 선호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안정적으로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형식으로 인식되기 때문인가 싶습니다.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박목월의「閏四月」입니다.
외딴 산봉우리에(배경) 꾀꼬리가 울면(대상),
외딴 집(배경)의 눈먼 처녀가 엿듣는다(대상)는 내용입니다.
제1, 2연에서는 배경과 대상이 각각 분할되어 있는 데 반해
제3연에서는 전후 행에 배경과 대상을 함께 담고 있는 것이 다를 뿐
'어디에 무엇이 어찌하면, 어디에 무엇이 어찌한다'의
배경과 대상이 두 개 병치되어 있는 4단 구조입니다.
지난번에 예로 보였던 박목월의 「산도화·1」도
배경과 대상이 두 번 병치되어 있는 4단 구조였습니다.
이처럼 4단계의 전개가 '짝을 이룬 대우'들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4개의 대등한 정황을 늘어놓는 병치의 구조일 수도 있고
단계의 앞뒤가 서로 이어지는 연쇄 구조일 수도 있고
각 단계가 정도를 점점 고조시켜 가는 점층 구조일 수도 있고
순서를 좇아 진행되는 순차(順次) 구조일 수도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육사의 「정정」,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등
4단 구조로 이루어진 좋은 작품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비록 외형은 4연으로 되어 있지 않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의미 구조상 4단계로 볼 수 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습니다.
영산홍 꽃잎에는
山이 어리고
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小室宅
小室宅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山 너머 바다는
보름사리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서정주「映山紅」전문
이 작품의 외형적 배열은 5연으로 되어 있지만 의미 전개는 4단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제3연까지 각 연의 제1행과 제2행이 배경과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와는 달리 제4연과 제5연에서는 연 단위로 배경과 대상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의미 구조로 본다면 제4, 5연은 한 부분으로 묶일 수 있어서
전체 작품은 기승전결의 4단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연까지는 앞말의 꼬리를 이어받는 연쇄 구조인 것도 재미있습니다.
행 단위로 ㅅ, ㄴ, ㅈ 등이 빚어낸 압운적인 효과도 조화롭습니다.
한 여성의 애잔한 삶을 아름답게 승화기킨 작품입니다.
미당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 유수한 수작의 하나로 평가할 만합니다.
,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 감상은 첨부자료로 덧붙이겠습니다.
4단 전개가 시인들이 선호하는 보편적인 구조인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임보.
[참고 자료]
시「영산홍」은『文學』(1966.11.)에 발표된 뒤, 시집『冬天』(1968.11.)에 수록되어 전한다.
미당이 1915년 생이니 지천명의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어 쓴 작품이다.
전 5연으로 이루어진 2행시인데 7·5조의 율격에 담긴 아름다운 소품이다.
얼른 보기엔 별로 대단한 작품 같지 않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서정의 구조가 그렇게 단순치 않음을 알게 된다.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 아니다.
제1연 시작부터 잘 풀리지 않는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의 정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작은 영산홍 꽃잎에 어떻게 산이 어린다는 것인가?
산 그림자가 영산홍 꽃잎에 드리운다는 표현인가?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별로 흡족하지가 못하다.
그러면 어떤 정황을 그렇게 그리고 있단 말인가.
영산홍의 한자 표기 '映山紅'의 '映'은 '비추다, 비치다, 덮어 가리다' 등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 '映山紅'이라는 말은 '산이 어른거리며 비치는 빨간(紅) 꽃'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아마 그랬으리라. 그러나 이 구절이 이런 단순한 이미지만을 서술하는 데 그쳤다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
이 구절은 제2연으로 이어지면서 복합적인 의미망을 새로이 형성하게 된다.
우선 제2연을 살펴본 다음 그 복합적인 의미망을 따져보도록 하자.
제2연은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을 제시하고 있다.
'슬픈'으로 미루어 보아 그 소실댁은 아마도 님의 사랑을 이젠 제대로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으로 짐작된다.
간밤에 이제나저제나 혹 님이 찾아올까 잠 못 이루며 전전반측 기다리다 지샜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지금도 님 생각에 젖어 있다가 낮잠 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산자락'의 그 '산'은 님의 상징물로 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제1연에서의 산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선다.
이 역시 님의 상징어로 본다면 영산홍은 여인 곧 소실댁이 된다.
영산홍처럼 아름답고 젊은 소실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제1연은 겉으로는 영산홍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님 생각에 젖어 있는 아름다운 한 여인을 거기에 포개어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의 은근한 감춤의 멋이 있다.
제3연에서는 대상을 바꾸어 툇마루에 놓인 요강을 등장시킨다.
원래 요강이 놓일 장소는 은밀한 방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요강은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마루에 나와 있다.
그것도 원마루에 잇대어 달아낸 툇마루다. 툇마루는 잉여적 공간이다.
마치 본부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덧붙어 둘째 아내로 살고 있는 소실댁과 흡사한 처지다.
잉여적 공간에 방치된 요강은 다름 아닌 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된 소실댁을 상징한다.
여기서의 요강은 T. S.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의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
제4연부터서는 이제까지 전개해 오던 소실댁 주변의 정경과는 달리
시선을 180도 돌려 엉뚱하게 바다를 끌어들이고 있다.
보름사리는 보름 무렵의 조수 곧 가장 충만한 만조(滿潮)를 이루는 시기다.
제5연은 소금 발이 쓰려 우는 갈매기를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 당황하게 된다.
도대체 갈매기 얘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 온 의미구조로 본다면 갈매기도 분명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 것 같다.
우선 갈매기가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소금 발이 쓰리다'는 것은 발이 소금기에 절여서 아프다는 뜻이리라.
왜 소금기에 절였을까. 바닷물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리라.
밀물을 타고 몰려오는 고기떼들을 잡아먹기 위해 정신없이 바다에 발을 담그다 보니 절었으리라.
그러니 여기서의 갈매기의 울음은 괴로워서라기보다는 즐거운 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갈매기의 정체가 떠오른다.
갈매기는 곧 님이 아니겠는가.
소실댁은 돌아본 척도 않고 외지에 나가 여성편력에 여념이 없는 님을
물고기 사냥에 빠져있는 갈매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 *
미당은 산문 「영산홍 이야기」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재미있다.
그는 이 작품을 쓸 무렵까지도 영산홍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소학교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갔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한때 승지의 소실이었다. 그 집 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기에 그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영산홍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꽃은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山丹)이었던 것을 쉰이 넘어서야 알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잘못 아는 것이 때로는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변명한다. 사실 미당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빨간 산단꽃과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만일 그 꽃의 이름이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 작품의 첫 연과 같은 구절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작품 「영산홍」은 아예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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