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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방/★좋은시★

서정주시 모음

by 미스커피 2011. 11. 15.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광화문(光化門)

 

서정주
 

북악(北岳)과 삼각(三角)이
형과 그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형의 어깨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서 있는 것을 보고 가다가
어느새인지 광화문 앞에 다다랐다.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宗敎).
조선 사람은 흔히 그 머리로부터 왼 몸에 사무쳐 오는 빛을
마침내 버선코에서까지도 떠받들어야 할 마련이지만,
왼 하늘에 넘쳐 흐르는 푸른 광명(光明)을
광화문 - 저같이 의젓이 그 날갯죽지 위에 싣고 있는 자도 드물다.


상하 양층(上下兩層)의 지붕 위에
그득히 그득히 고이는 하늘.
위층엣 것은 드디어 치일치일 넘쳐라도 흐르지만,
지붕과 지붕 사이에는 신방(新房) 같은 다락이 있어
아랫층엣 것은 그리로 왼통 넘나들 마련이다.


옥(玉)같이 고우신 이
그 다락에 하늘 모아
사시라 함이렷다.


고개 숙여 성(城) 옆을 더듬어 가면
시정(市井)의 노랫소리도 오히려 태고(太古) 같고
문득 치켜든 머리 위에선
낮달도 파르르 떨며 흐른다.

 


귀촉도(歸蜀途)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銀河)ㅅ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화사(花蛇)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추천사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벼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데미로부터,
자잘한 나비새끼 꾀꼬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듯이, 향단아.


산호(珊瑚)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어 올려 다오.
향단아.

 


신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거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자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거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가신 이들의 헐떡이던 숨결로
곱게 곱게 씻기운 꽃이 피었다


흐트러진 머리털 그냥 그대로,
그 몸짓 그 음성 그냥 그대로,
옛사람의 노래는 여기 있어라.


오ㅡ 그 기름 묻은 머릿박 낱낱이 더위
땀 흘리고 간 옛사람들의
노랫소리는 하늘 우에 있어라


쉬여 가자 벗이여 쉬여서 가자
여기 새로 핀 크낙한 꽃 그늘에
벗이여 우리도 쉬여서 가자


맞나는 샘물마닥 목을 축이며
이끼 낀 바윗돌에 턱을 고이고
자칫하면 다시 못볼 하늘을 보자

 


무등을 보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동천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徐廷柱,1915~2000) 아호는 미당(未堂), 전라북도 고창출생.
1936년 <동아일보>신춘 문예에 시<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
1936년에 <시인부락>을 주재했으며, 시집에 <화사집>(1938),
<서정주 시선>(1945),<귀촉도>(1946),<질마재 신화>(1975),
<떠돌이의 시>(1976)등이 있다. 유치환과 더불어 생명파로 알려져 잇다.
보들레르와 니체의 영향을 받은 듯한 초기 시는 관능과 육체의 몸부림을 보였으나,
<귀촉도>무렵부터 한국의 토속과 고전, 그리고 동양 사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여,
<신라초>이후부터 신라의 전통과 불교적인 세계의 심화를 보여주고 있다.
1969년, <동천>은 불교의 세계를 더욱 심화시켰고, 1973년 <서정주 문학 전집>을
간행하여 그의 시, 수필, 잡록 등을 망라하여 간행했다.
불교 이후 그의 시세계는 샤머니즘과 예(藝)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질마재 신화>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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