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척 일 촌 오 푼 키에 이 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前時代) 같으면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는 클럼지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竹]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銅]처럼 휘어지며 구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
오 척 일 촌 오 푼 키[약 156cm]에 이 촌[약 6cm]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 부얼부얼한[살이 좀 있어서 복스러운 느낌을 주는] 맛은 전혀 잊어버린 얼굴이다. 몹시 차 보여서 좀체로 가까이하기 어려워한다[차가운 인상 때문에 사회적 관계가 원만치 못하다는 뜻]. 그린 듯 숱한 눈썹도 큼직한 눈에는 어울리는 듯도 싶다마는……. 전시대(前時代) 같으면[이조 시대를 말하는 듯] 환영을 받았을 삼단 같은 머리[삼을 묶은 단 같다는 뜻으로 숱이 많고 길이가 긴 머리를 비유하는 말]는 클럼지[clumsy : '꼴사나운, 손재주가 없는'이라는 뜻으로 외국어를 사용하는 데에서도 노천명의 우월 의식과 자존심이 담겨 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생뚱맞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집어넣는 노천명의 언어적 감각을 통해 영어를 섞어 쓰는 그의 사대주의적인 단면을 살펴 볼 수 있다. 물론 영어 한 단어 섞어 쓴 것 가지고 그런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그녀의 살아온 삶을 살펴 보면 평소의 태도가 반영되었다는 말이다.] 한 손에 예술품답지 않게 얹혀져 가냘픈 몸에 무게를 준다.[1930년대에 한 여성이 자신을 이렇게 객관화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또한 한편으로 인텔리 여성으로 지적 우월감이나 자부심,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이 점은 당시 일반적인 여성들의 삶과 시대를 앞서간다고 하는 인텔리 여성의 심리적 갈등, 시대와의 불화가 담겨 있는 표현일 수도 있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세 온스[약 28g을 가리키는 무게 단위]의 '살'만 더 있어도 무척 생색나게 내 얼굴에 쓸 데가 있는 것을 잘 알건만 무디지 못한 성격과는 타협하기가 어렵다. 처신을 하는 데는 산도야지[시적 화자의 비사교적인 성격과 반대되는 의미]처럼 대담하지 못하고 조그만 유언비어[(流言蜚語) : 아무 근거 없이 널리 퍼진 소문]에도 비겁하게 삼간다. 대[竹]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銅]처럼 휘어지며 구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가끔 자신을 괴롭힌다.[대처럼 꺾어질지언정 구리처럼 휘어지지 않는 내면의 강직성을 은연중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시적 화자가 말하고 있는 가냘픈 몸, 꼭 다문 입, 서글픈 버릇, 휘어지며 구부러지기가 어려운 성격은 시적 화자의 조화롭지 못해 불만족스런 외모와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비타협적이고 비사교적인 성격을 형상화한 시어들이고, 사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도야지'는 반대되는 의미이다.]
진정한 양심(良心)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흔히들 문학인들이 말하는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양심의 잣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라는 생각을 품게 하는 작품으로 진정으로 자신에게 부끄러워할 줄 알고, 부정한 세상에 대한 결벽, 비타협으로 삶을 마감했던 시인 '윤동주'의 '자화상'과 비교해서 읽으면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양심은 자신이 양심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양심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의 살아온 삶의 이력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양심적인 인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이 시는 시인의 인생(人生)을 살펴서 보면 민망할 뿐이다. 그토록 화려한 직함을 달았던 시인 노천명의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이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이들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하여간 이 시는 시인을 보고 작품을 읽으면 조금 민망하기는 하지만 젊은 시절에 그럴 수 있었으리라는 심정을 가지고 읽는다면 시적 화자가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갖는 고뇌를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형상화해 낸 것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여성의 고민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여성적인 매력도 없고, 당시 구여성들이 지녀야 하는 덕목과는 괴리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자신에 대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한 시인의 모습을 거의 직설적인 어투로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자아에 대한 열등감과 자존 의식이 복합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외모에 대한 불만족의 표출은 구여성이 가져야 하는 외모를 잣대로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시인의 자존 의식의 역설적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자신을 미화시키는 일부 문학인들의 미사여구(美辭麗句)에 진정한 안목 다시 말해서 역사적 인식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1911∼1957. 시인. 본관은 풍천(淵天). 처음 이름은 기선(基善), 천주교의 영세명은 베로니카. 황해도 장연 출신. 아버지는 계일(啓一)이고, 어머니는 김홍기(金鴻基)이다. 아버지가 죽자 1919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여 진명보통학교에 입학, 5학년 때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문단 친우로는 모윤숙(毛允淑)·김광섭(金珖燮)·이헌구(李軒求) 등이 있다. 홍해성(洪海星)·유치진(柳致眞)·김진섭(金晉燮)·서항석(徐恒錫) 등이 주관하여 결성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8년 체호프(Chekhov,A.P.)의 〈앵화원 櫻花園〉을 공연할 때 모윤숙과 출연하여 아냐 역을 맡기도 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직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다가 3년 뒤 신문사를 사임하고 잠시 북간도의 용정(龍井)과 연길(延吉) 등지를 여행하고 나서, ≪여성 女性≫의 편집부와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서울신문사 문화부와 부녀신문사 편집차장을 역임하였다. 6·25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임화(林和) 등이 주도하는 문학가동맹(文學家同盟)에 참여한 혐의로 수복 후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어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서라벌예술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에 있으면서 ≪이화 70년사≫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극도로 쇠약해져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1957년에 죽었다. 노천명의 시작 활동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시작되었다.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시절에도 당시 일본에서 간행된 어린이 잡지에 응모하여 입상하는 등 시재(詩才)가 뛰어나, 시를 지어 학우들 앞에서 낭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에 발표한 시는 〈고성허(古城墟)에서〉(뒤에 滿月臺로 개작) 외 5편을 ≪이화≫지에, 〈밤의 찬미(讚美)〉 외 2편을 ≪신동아≫에, 〈제석 除夕〉을 ≪신가정 新家庭≫에 발표하였다. 졸업 후 1935년에는 ≪시원 詩苑≫ 동인으로 시 〈내 청춘(靑春)의 배는〉(1935.2.)을 발표하였다. 노천명을 ‘사슴의 시인’이라 하는데, 〈사슴〉은 1938년 간행된 제1시집 ≪산호림 珊瑚林≫에 실린 49편 중에서 대표작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또한 〈자화상 自怜像〉·〈귀뚜라미〉·〈생가 生家〉·〈장날〉·〈연잣간〉·〈돌아오는 길〉 등의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있다. 제2시집 ≪창변 窓邊≫은 1945년 매일신보사에서 간행하였는데 〈남사당 男寺黨〉·〈춘향 春香〉·〈푸른 오월〉·〈장미 薔薇〉 등을 주요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고독과 향수, 소박하면서도 여성 특유의 섬세한 정감의 세계, 이것이 그 초기 시집 ≪산호림≫과 ≪창변≫의 시편들에 일관하는 특색이 되고 있다. 이 때의 시세계는 망향의 정을 담은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풍물시들을 잘 절제된 감정으로 투영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의 후기 시세계로 나타나는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는 6·25 당시 옥고를 치른 체험을 바탕으로 쓴 옥중시 〈영어(囹圄)에서〉 외 20편과 그 밖에 〈설중매 雪中梅〉·〈검정나비〉·〈그리운 마을〉·〈별을 쳐다보며〉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때의 시 경향은 감옥에서의 수난 체험과 거기서 오는 현실도피적인 시, 반공애국시, 그리고 고향에 대한 향수 등이 담겨 있다. 제4집 ≪사슴의 노래≫는 그의 사후 1958년 한림사(翰林社)에서 간행하였는데, 수 편의 미발표 유작시도 실려 있다. 대표적인 시를 들면 〈유월(六月)의 언덕〉·〈비련송 悲戀頌〉·〈사슴의 노래〉·〈내 가슴에 장미(薔薇)를〉·〈나에게 레몬을〉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시는 전통적인 여류시의 맥락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모순으로서의 인생, 고독과 비극으로서의 생의 본질을 끊임없이 응시하고 그것을 견디어나가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당대 여류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산문집으로는 수필집 ≪산딸기≫(1948)와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1954)·≪여성서간문독본 女性書簡文讀本≫(1955) 등이 있다. 이 밖에 〈사월이〉(1939)·〈하숙 下宿〉·〈외로운 사람들〉 등 몇 편의 소설과 평론이 있다. 경기도 고양시 벽제읍에 있는 묘지의 묘비는 김충현(金忠顯)의 글씨로, 시 〈고별 告別〉의 일절이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詩人 天命과의 交友와 回想(金珖燮, 自由文學 3권7호, 1958), 盧天命硏究(李姓敎, 誠信女子師範大學人文科學硏究所論文集 1, 1968), 특집 盧天命總整理(金芝鄕, 詩文學 10, 1973), 盧天命의 初期作品攷(金軟東, 陶南趙潤濟博士古稀紀念論叢, 螢雪出版社, 1976), 盧天命詩의 自傳的要素(許英子, 韓國現代詩史硏究, 1983), 盧天命論(李仁福, 아세아여성연구 22, 1983).(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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