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저기 보이는 시푸런 강과 또 산을 넘어야 진종일은 별일없이 보낸 것이 된다. 서녘 하늘은 장미빛 무늬로 타는 큰 눈의 창을 열어… 지친 날개를 바라보며 서로 가슴 타는 그러한 거리에 숨이 흐르고 모진 바람이 분다. 그런 속에서 피비린내 나게 싸우는 나비 한 마리의 상채기. 첫 고향의 꽃밭에 마즈막까지 의지하려는 강렬한 바라움의 향기였다. 앞으로도 저 강을 건너 산을 넘으려면 몇 '마일'은 더 날아야 한다. 이미 그 날개 피에 젖을 대로 젖고 시린 바람이 자꾸 불어간다. 목이 바싹 말라 버리고 숨결이 가쁜 여기는 아직도 싸늘한 적지(敵地). 벽, 벽… 처음으로 나비는 벽이 무엇인가를 알며 피로 적신 날개를 가지고도 날아야만 했다. 바람은 다시 분다. 얼마쯤 날으면 아방(我方)의 따시하고 슬픈 철조망 속에 안길. 이런 마즈막 '꽃밭'을 그리며 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슬픈 표시의 벽, 기(旗)여…
지금 저기 보이는 시푸런 강과 또 산을 넘어야 진종일은 별일없이 보낸 것이 된다. 서녘 하늘은 장미빛 무늬로 타는 큰 눈의 창을 열어… 지친 날개를 바라보며 서로 가슴 타는 그러한 거리에 숨이 흐르고 모진 바람(외세와 분단의 바람)이 분다. 그런 속에서 피비린내 나게 싸우는 나비(시대 상황에 상처받은 우리 민족의 모습, 그 중에서도 가녀린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모습) 한 마리의 상채기(생채기의 잘못, 손톱 따위로 할퀴어지거나 긁히어서 생긴 작은 상처. 동족 상잔의 흔적) 첫 고향의 꽃밭에 마즈막까지 의지하려는 강렬한 바라움의 향기였다. 앞으로도 저 강을 건너 산을 넘으려면 몇 '마일'은 더 날아야 한다(우리 민족이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고난의 길). 이미 그 날개 피에 젖을 대로 젖고 시린 바람(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분단 상황)이 자꾸 불어간다. 목이 바싹 말라 버리고 숨결이 가쁜 여기는 아직도 싸늘한 적지(敵地)(현실적인 남과 북의 상황으로 적대 세력 아래에 있는 땅). 벽, 벽… 처음으로 나비는 벽(분단 조국 상징)이 무엇인가를 알며 피로 적신 날개를 가지고도 날아야만 했다(자신의 숙명에 대한 의식으로 우의적인 형상화 수법). 바람은 다시 분다. 얼마쯤 날으면 아방(我方 : 우리쪽)의 따시하고 슬픈 철조망 속에 안길. 이런 마즈막 '꽃밭(더 이상 다툼이 없고, 사랑으로 충만한 화해의 세계, 평화로운 세계)'을 그리며 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 어슬픈 표시의 벽(분단을 상징하지만 넘을 수 없는 절대벽이 아니고, 의지만 있으면 넘을 수 있는 분단의 벽), 기(旗)여…(끊임없이 추구하고 도전해야 하는 우리의 숙명적 평화의 의지)
이 시는 '나비'와 '철조망'이라는 두 개의 이질적인 제재를 통해,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형상화하고 통일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 작품이다. '나비'는 근현대사의 질곡(桎梏)을 겪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며, '철조망'은 분단과 현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시인은 남쪽 또는 북쪽의 입장에서 상대를 적대시하는 관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분단과 대치의 상황이 반드시 끝나야 함을 말하고 있다. '나비'의 관점에서는 '얼마쯤 날으면 아방(我邦)의 따시하고 슬픈 철조망 속에' 안길까 하고 초조감과 피로감을 토로하지만, 시인은 이런 '철조망'이 아니라 진정한 '꽃밭'을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1 평화와 화해로 충만한 세계에 대한 열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분단된 조국이 서로의 적대감을 버리고 평화롭게 하나가 되는 세상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철조망'과 '벽'이 분단된 조국의 상징이라면, 연약한 '나비'의 형상은 그러한 시대 상황에 상처받은 우리 민족의 모습, 그 중에서도 가녀린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우의적인 형상화 수법에 의존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2 이 시는 전쟁과 그로 인해 폐허가 된 조국의 모습, 그리고 분단된 민족의 안타까운 운명을 형상화 한 박봉우의 초기 작품 중의 하나이다. 작품 속에서 나비는 피를 흘리며 날고 있는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피에 적신 날개를 가지고도 나비는 모진 바람 속을 날아야 함을, 시푸런 강과 산을 넘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피에 젖은 연약한 나비의 모습은 전쟁과 분단으로 상처 입은 비극적인 민족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그러나 작품 안에서 나비는 그저 상처입고 주저앉는 나약한 모습으로만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나비는 분명 피에 젖을 대로 젖고 목이 바싹 말라버리고 숨결이 가쁘지만, 그래도 날아야 한다는 자신의 숙명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끝끝내 도달하게 될 철조망이 비록 슬프더라도 마지막까지 꽃밭을 그린다.
나비는 꽃을 좋아하는 동물로서 일찍이 서화나 시가의 소재가 되었다. ≪삼국유사≫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條)에는 선덕여왕이 당 태종(太宗)이 보낸 모란의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그 꽃이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기록이 있다.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四佛山·掘佛山·萬佛山條)에는 신라 경덕왕이 당나라 대종(代宗)이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만불산을 만들어 바쳤는데,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으므로 조금만 문 안으로 바람이 들어가면 벌과 나비가 훨훨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세시기≫에도 오월 단오에 단오선(端午扇)을 만드는데, 기생이나 무당의 부채에는 나비·흰붕어·해오라기의 그림이 많다고 하였다. ≪경도잡지 京都雜志≫에도 작은 병풍에는 꽃·새·나비 등을 그린다고 하였다. 이처럼 나비는 꽃을 그리는 그림이면 으레 들어가게 마련이어서 그림의 소재로 빈번히 등장되었다. 또, 꽃을 여자에 비유하고 나비는 남자에 비유하여, 그리운 여인을 본 남자가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 없다는 의미로 ‘꽃 본 나비 담 넘어가랴.’라는 속담을 쓰고, 남녀의 정이 깊어 비록 죽을 위험이 뒤따르더라도 찾아가 즐김을 이르는 말로 ‘꽃 본 나비 불을 헤아리랴.’라고 한다. 이처럼 꽃과 나비는 물과 기러기, 여자와 남자의 관계로 인식되었다. 흔히 불리는 민요 중에 “나비야 청산을 가자/호랑나비야 너도 가자/가다가 길 저물거든 꽃잎 속에서 자고 가자/꽃잎이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라도 자고 가자.”라는 노래가 있는데, 여기서도 꽃과 나비는 남녀관계로 비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비에 관한 속신(俗信)은 나비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른 봄에 흰나비가 집안으로 들어오면 그 집에 초상이 난다고 하고, 제일 먼저 흰나비부터 보면 소복을 입게 된다고도 한다. 민요가사 중에 “백설 같은 흰나비는 부모님 거상을 입었는 듯/장다리 밭으로 날아든다.”는 구절은 이 같은 흰나비에 대한 관념을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호랑나비는 좋은 조짐으로 인식되었다. 아침에 호랑나비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하고, 이른봄에 호랑나비를 보면 신수가 좋다는 말이 있다. 그 밖에 나비가 불에 뛰어드는 것을 보면 패한다고 하며, 나비를 만진 손으로 눈을 비비면 눈이 먼다는 금기도 있다. 나비에 관련된 설화로는 〈황나비무덤전설〉과 〈나비의 유래〉 등이 있다. 황해도 신천군 만궁리 뒷산에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청군과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황장군의 무덤이 있는데, 황장군이 죽었을 때 한 마리의 노랑나비가 날아와 조의를 표하므로 이 나비도 황장군과 함께 묻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무덤을 〈황나비무덤〉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나비의 유래〉는 중국의 〈축영대설화 祝英臺說話〉와 같은 내용인데 〈문도령설화〉라고도 한다. 남장한 처녀가 동문수학하면서 앞날을 약속한 문도령을 못잊어 문도령이 죽은 무덤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는데, 이 때 여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옷자락이 뜯어지면서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는 이야기이다. 이 설화는 함경도 무가 〈문굿〉으로도 전승된다. 그 밖에도 나비는 시나 소설의 소재로 많이 등장되었으며, 노리개와 같은 공예품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요즈음은 나비의 날개를 떼어내어 비닐 사이에 넣고 눌러 만든 테이블보, 물감 대신에 날개의 색채와 무늬를 이용하여 그린 나비 그림, 나비 표본을 액자에 넣어 만든 벽걸이 등의 장식품을 만들고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東國歲時記, 京都雜志, 物名考, 生物學硏究(石宙明, 生物學硏究會, 1954), 나비들의 세계(미승우, 경웅아동문화사, 1958), 韓國民間傳說集(崔常壽, 通文館, 1958), 韓國昆蟲分布圖鑑-나비篇-(金昌煥, 高麗大學校 出版部, 1976), 한국의 禁忌語吉兆語(金聖培, 正音社, 1981), 韓國蝶誌(李承模, Insect Koreana 編纂委員會, 1982).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는 ‘어떤’ 뜻을 나타낸다. 이것이 기의 주요 기능 가운데의 하나인 상징성이다. 의견이 분분할 때 자기 편의 태도를 확실히 밝히면 ‘기치가 선명하다. ’고 한다. 이와 같이 기는 드러내 보일 때와 뉘어서 숨길 때와는 그 상징하는 뜻이 달라진다. 군대가 진격해서 고지를 점령하면 맨 먼저 자기편의 기를 꽂는다. 그러면 한쪽은 사기가 충천하고 한쪽은 풀이 죽는다. 6·25전쟁 때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국군이 맨 먼저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는 광경을 보고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의 나제전(羅濟戰)에도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시켜 성가퀴 너머에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백제 왕자 태(泰)는 매우 급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군기(軍旗)가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을 보여준다. 또, 기는 정복을 상징한다. 탐험가나 등산가들이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면 거기에 자기 나라 국기를 꽂아 정복을 표시한다.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국의 우주인들이 성조기를 꽂고 돌아온 것도 같은 보기이다. 기는 신호로 쓰이기도 한다. 전쟁에서의 백기는 평화 또는 항복을 뜻하고, 철도에서 푸른 기를 흔들면 기차가 진행하고 붉은 기를 흔들면 정지한다. 적십자기는 의료기관을 상징하므로 전쟁에서도 그 표지가 있는 곳은 공격하지 않는다. 옛날 전쟁에서 적을 협공할 때 맞은편의 아군과 기로써 신호를 하였다. 이때 쌍방이 미리 정한 방법에 따라 여러 개의 기를 차례로 사용하면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도 서로 전달할 수 있었다. 또, 옛날 지휘관은 자신의 지위와 책무를 쓴 기를 높이 세우고, 손에도 수기를 들어 위의를 표시하며, 이것을 휘둘러 군대를 지휘하였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손에 든 학털 부채는 군사(軍師)를 상징하는 수기의 구실을 하였고, 우리 농악대가 전립(戰笠) 끝에서 돌리는 상모도 지휘용 수기와 같은 구실을 하던 것이다. 그러나 군대의 위용은 방위에 따라 오색기를 휘날리며 여러 개의 북을 둥둥 울리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병서(兵書)에도 “정정한 기는 맞서 싸우지 말며, 당당한 기는 치지 말라.”고 하였다. 군대의 진용과 사기는 깃발로써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장백산에 기를 꽂고 두만강에 말 씻기니……”라는 시조에서도 장백산에서 휘날리는 깃발로 김종서(金宗瑞)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성을 수비하며 조련할 때의 예를 보면, 낮전투에서 정문을 닫고 쉬게 할 때는 숙정패(肅靜牌)를 내걸고 표미기(豹尾旗)를 세운 뒤 휴식호령을 내리게 되어 있고, 밤조련에서는 방위에 따라 고초기(高招旗)의 색깔을 달리하여 세우면 그 색깔에 해당되는 대열이 출동하게 되어 있다.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 정유(丁酉) 9월 16일조의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장수 하나가 물러나 저만큼 간 것을 보고, 곧장 회선하여 그부터 목 베어 효시하고 싶었으나, 나의 배가 돌아서면 여러 배가 동요될 듯하여 중군에게 휘(麾:군령을 내리는 기)와 초요기(招搖旗:장수를 부르며 지휘 호령하는 기)를 세우게 하니 그들의 배가 돌쳐서 왔다.”는 대목이 있어 해전에서 군기의 쓰임새가 실감 있게 표현되고 있다. 어선에서는 풍어가 되면 오색천을 길게 달아 나부끼게 함으로써 용왕에게 감사하고 기쁨을 나타낸다. 무당이 굿할 때에는 색깔을 갖춘 여러 개의 기 가운데에서 하나를 뽑게 하여 그 기의 빛깔로 사람의 운세를 점치기도 하는데, 붉은색의 기를 뽑으면 운세가 왕성하고 노란색의 기를 뽑으면 운세가 시든다는 등으로 해석을 한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만국기를 다는 것은 축제의 상징이다. 이와 같은 기의 상징성은 우리 생활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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