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 : 누더기, 외면적 초라함, 물질적 궁핍)에 지나지 않는다.[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 가난이란 몸에 걸친 헌 누더기와 같은 것이어서, 그 속에 숨겨진 우리의 타고난 순수한 마음까지는 결코 가릴 수가 없다. 가난에 대한 작자의 태도가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표현으로, 이 시 전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시행]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짙은 초록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변함 없이 의연한 태도 - 교훈적 존재]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물질적 궁핍과 대비되는 인간 본연의 근원적 순수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가난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가릴 수 없음 - 설의법]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 : 지초(芝草 : 영지)와 난초로 모두 향초(香草)임)을 기르듯[소중하고 깨끗하게] 우리는 우리 새끼[자녀]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 청산의 의연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본받음- 소중하고 깨끗하게 자식을 길러냄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큰 물결이 거칠게 일어나] 휘어드는[가난에 의해 기운을 잃고 풀이 꺾이는] 오후의 때[현실적 삶의 한계 상황 - 가시덤불 쑥구렁과 같은 의미]가 오거든,[목숨이 가다가다 - 오후의 때가 오거든, : 인간의 삶이 순조롭게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힘겹고 견디기 힘든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이렇듯 간헐적으로 우리를 엄습해 오는 시련과 고통을 작자는 '농울쳐'라는 감각적인 시어를 통해 절묘하게 표현.] 내외[부부]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삶을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임 - 어려운 삶을 이기기 위한 태도]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지어미는 지애비를 - 이마라도 짚어라. : 어려운 시절일수록 부부 간에 서로를 생각하는 사랑과 배려가 더욱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함.]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외부의 험난한 현실 - 고통스러운 삶의 조건]에 누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감추어진 소중한 존재 - 고결한 정신과 아름다움]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 : 푸른 이끼 - 품위, 지조)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은 3연의 '목숨이 가다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 오후'와 대응되는 시행으로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암시하는 어구이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옥돌처럼 높은 정신적 품격을 결코 잃지 말라는 것이 바로 이 부분에 담긴 뜻]
서정주의 작품 중에서 초기시의 정신적 갈등이 해소되고, 안정과 조화, 달관(達觀)의 경지로 발전한 후기시의 세계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시의 창작 동기를 보면 시인은 6.25 동란 후 몇 년인가를 시인은 광주에서 기거하며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아 그 당시 대학의 교수에 대한 처우는 말이 아닐 정도였다 한다. 내 남 없이 모두 궁핍하던 때인 만큼 점심을 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불가항력으로 일생에 처음 당하는 물질적 궁핍 속에서, 크고 의젓하고 언제나 변함 없는 무등산을 보며 시인은 이 시를 썼다고 한다. 그는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선연히 서 있는 무등산의 모습에서 교훈을 찾고 있다. 즉, 인간의 본질은 물질적 궁핍으로 왜곡되거나 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난해도 자식을 소중히 하고, 부부간에 서로 의지하고 믿음으로써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서는 자기 삶의 현실을 '가시덤불 쑥구렁(고난, 시련) 속에서도 옥돌같이 묻혀 있다.'는 정신적 승리감으로 대치한 의지적 자세를 보인다.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는 산을 바라보며 시인은 헐벗은 자신의 처지를 차라리 떳떳하게 생각한다. 가난이란 한낱 우리 몸에 걸친 헌 누더기 같은 것이어서, 가난할수록 허릿잔등이 드러나듯이 우리의 타고난 순수한 마음씨는 오히려 더욱더 빛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이 시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기본적인 토대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작자는 마침내 푸른 산의 그 기슭에 향초(香草)를 기르며 살 듯이,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우리는 슬하의 자식들을 소중하고 품위 있게 기르며 살 수밖에 없다는, 삶에 대한 의연한 긍정의 자세를 취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삶이 늘 순조롭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사 힘겹고 괴로운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지혜를 가질 것을 시인은 당부하고 있다. 시는 인격이라는 말이 있지만 궁핍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고매한 인격이 이 시에는 아주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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