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碇泊)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港口)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요점 정리
지은이 : 황동규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서정적. 주지적
어조 :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
심상 : 묘사적, 시각적 심상
표현 : 내면적 고백보다는 객관적 묘사에 의존하고 있음. 외면적 풍경을 통해 시인의 내면을 암시하고 있음. 사물을 의인화하여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정서를 담고 있는 매개물로 사용
구성 :
1연 항구 도착
2연 항구 풍경
3연 항구에서의 행동
4연 배들의 모습
5연 하늘의 눈송이
제재 : 항구, 바람, 배, 눈송이
주제 : 여행지에서의 삶의 쓸쓸함
출전 : <현대문학>(1967)
내용 연구
기항지(寄港地)[배나 비행기가 운항 도중에 들르는 곳 / 항구(港口) : 바닷가에 배를 댈 수 있도록 시설해 놓은 곳. 항구는 일반적으로 떠남과 돌아옴, 만남과 이별의 이미지로 쓰인다. 항구는 또 떠돔, 유동(流動)의 이미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강인한 생명력의 표상으로 쓰인다.]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항구의 서경이 토박이가 아닌 나그네의 눈에 비친 것임을 시사한다. 이런 항구는 나그네에게 있어 어떤 동경의 대상으로 그려져 있다.] - 항구 도착
길게 부는 한지(寒地)[추운 지방]의 바람[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화자의 내면을 암시함]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쓸쓸하고 스산한 분위기(불안한 심정 표출) ]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눈송이는 차갑지만 불빛은 따스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불빛은 시인에게 따스한 곳에 닿고 싶은 낭만적인 그리움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불빛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안락, 평화, 휴식에의 초대 같은 것들을 연상시킨다. 불빛은 우리에게 따스함을 주고 활력을 준다. 따라서 불빛은 시인이 열렬히 동경하는 어떤 공간이다. 그 공간은 시인의 내면적인 사상과 감정의 세계, 시인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이며, 삶의 화해 상태를 꿈꾸는 시인의 욕망이 성취되는 행복한 공간] -항구 풍경
지전(紙錢)[지폐]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구겨 넣고', '그림자처럼 꺼버리고'는 소명의 이미지로 우울한 내면 심리의 표출]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우울한 심정으로 배에 다가감]. - 항구에서의 행동
정박(碇泊)[배가 닻을 내리고 머무름]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큰 배 밑바닥의 한가운데를 이물(배의 머리)에서 고물(배의 뒤끝)에 걸쳐 선체를 받치는 길고 큰 목재]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港口)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의인화된 표현, 정박(碇泊) 중의 어두운 - 항구(港口)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 한밤중의 배들이 뱃머리를 바다 쪽이 아닌 항구 쪽을 향해 있었다는 뜻으로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는 배의 모습은, 곧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바다는 무한한 자유의 표상이며 동경의 장소이다. 방황은 그런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그러나 화자는 여기서 방황하고 떠돌아야만 하는 불확실한 바다의 삶보다는 안전한 육지의 삶을 희구하여 본다. 정박 중인 어두운 용골들이 바다를 바라보는 곳이 아니라 항구의 안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안락한 현실에 안착하고 싶은 화자의 무의식적 욕망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배들의 모습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 개(數三個)의 눈송이[부유하는 눈발은 새의 이미지로 연결되어 자유를 갈망하는 화자의 마음을 암시함]
하늘의 새들[자유에 대한 동경]이 따르고 있었다.[바람에 흩날리며 내리는 눈발을 현란한 이미지로 그려내어 하강의 이미지를 상승의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만들고 있다. 시적 화자는 현실에 안착하고 싶은 욕망에서 머물지 않고 '눈송이'’와 '새'로 상징되는 자유를 향한 동경의 욕망을 보여 줌.] - 하늘의 눈송이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화자의 어두운 내면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는 항구에 도착했다는 화자의 말로 시작한다. 아마도 이 나그네가 육지의 끝까지 걸어온 것에 대한 동경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화자가 발견한 것은 정박해 있는 배이며, 그 배의 앙상함이 주는 쓸쓸함과 겨울밤 흩날리는 눈송이가 주는 황량함이었다. 이는 홀로 방황하는 화자의 우울한 내면이 투영된 풍경 묘사로 볼 수 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화자는 여행 중이며, 여행의 끝에 도착한 항구는 젊은 날의 방황 끝에 찾아든 곳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항구의 밤 풍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화자의 모습 역시 어딘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화자의 어두운 그림자는 어딘가 정착하지 못하고 어둡고 암울한 현실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지성(知性)의 상징일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시 전반부의 상황이 서정적 자아의 내면적 상황과 일치하도록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소재들이 환기하는 막연함, 차가움, 덧없음 등의 정서는 그러한 심리적 상황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 배가 중심적인 대상으로 제시되면서 오히려 서성거림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정박되어 있으며 거대한 용골로 솟아 있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는 배의 이미지는 현실을 버티어 내는 견고함의 의미를 떠올려 준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부분에서 '수삼 개(數三個)의 눈송이'와 그것을 따르는 '하늘의 새들'을 통해 방랑하는 화자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드러내고 있고, 화자의 암울한 의식은 '하늘을 나는 새'를 통해 정화되게 된다. 하여튼 이 시가 항구의 정경을 선택해서 보여준다는 점이다. 나그네가 포착한 항구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나그네가 포착한 항구의 모습은 끁르쓸한 방랑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이 세상도 우리의 긴 인생 항로에 비추어 보면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잠시 머무른 기항지가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갖게도 한다.
이해와 감상1
이 시의 풍경은 단순하게 외면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정박해 있는 배와 겨울밤에 흩날리는 몇 개의 눈송이는, 황량하고 가혹하기까지 한 시인의 내면 풍경을 암시하고 있다. 화자는 여행 중에 있으며, 여행의 과정 중 항구에 도착한다. 여행은 곧 젊은 날의 방황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에서 시인은 사물을 그리되 사물의 단순 묘사를 넘어서 사물에 드리워진 시인의 내면적 정서를 표현한다. 시는 미묘한 마음의 출렁임을 그리고 있으며 그러한 마음의 출렁임을 보여 주는 객관적 상관물로써 제시된 것이 밤바다에 출렁이는 '배'다. 배는 묶여서 흔들리며 항구의 안쪽을 응시하고 있다. 이는 곧,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두운 하늘을 떠다니는 눈송이는 정처없이 방황하는 젊은 시인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눈송이의 모습은 단순히 방황하는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의 이미지로 변용되어 초월적인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제시되고 있다.
심화 자료
황동규(黃東奎)
1938년 서울 출생. 시인. 서울 출생. 서울대 교수. 1958년 <현대문학>에 ‘시월’, ‘즐거운 편지’ 등이 추천되어 등단. 여행을 통하여 외면적인 풍경을 묘사하되 단순히 그 풍경들이 외면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황량하고 삭막한 내면의 풍경들을 드러내는 데 그는 일정한 시적 성취를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삼남에 내리는 비>, <풍장(風葬)> 등이 있다.
시상의 전개
황동규 시에서 보여지는 풍경은 여행을 통해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김우창은 황동규의 시에 대한 해설 '내적 의식과 의식이 지칭하는 것'에서 "풍경은 슬픔의 기호이다. 그리하여 풍경에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시공간이 아님은 물론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특징도 아니며, 주로 내면화된 느낌의 일반성에 대응하는 일반화된 암시적 효과이다."라고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의 초기시에서 구체적 사물들은 시인의 내면적 정서를 나타내 주는 객관적 상관물로 드러난다. 시인의 내면적 심정을 직설적으로 토로하거나 표현하지 않고 이렇듯 사물을 통해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은 영미 주지시의 전통적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황동규의 시에는 겨울 바다, 항구, 눈 등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항구의 시들은 서정과 우울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단아한 정취를 이끌어 내고 있으며, '기항지 Ⅰ'은 이러한 시인의 중기 작품에 속한다.
눈 : 대기 중의 찬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 눈은 그 색깔이 하얗다는 속성 때문에 순결성과 진실성의 표상이 된다. 또 눈은 모든 것을 덮는다는 측면과 관련해서는 포근함과 높낮이 없이 그르게 내린다는 점에서는 평등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눈이 환기하는 정조는 그리움과 기쁨이며 특히 첫눈은 막연한 설레임도 동반한다. 싸락눈과 진눈깨비는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데 비해 함박눈은 완전함을 상징한다.
기항지(寄港地) 2
다색(多色)의 새벽 하늘
두고 갈 것은 없다, 선창에 불빛 흘리는 낯익은 배의 구도(構圖)
밧줄을 푸는 늙은 뱃군의 실루에트
출렁이며 끊기는 새벽 하늘
뱃고동이 운다
선짓국집 밖은 새벽 취기
누가 소리죽여 웃는다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철새의 전부를 남북(南北)으로 당기는
마음의 마찰음(音) 끊기고
바람 받는 마스트의 검은 깃발
축대에 바닷물이 튀어오른다
누가 소리죽여 웃는다
아직 젊군
다색(多色)의 새벽 하늘.
<평균율 1, 창우사,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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