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鶴) / 서정주
천년 맺힌 시름을
출렁이는 물살도 없이
고운 강물이 흐르듯
학이 날은다
천년을 보던 눈이
천년을 파닥거리던 날개가
또 한번 천애에 맞부딪노나.
산덩어리 같아야 할 분노가
초목도 울려야 할 설움이
저리도 조용히 흐르는구나
보라, 옥빛, 꼭두선이,
보라, 옥빛, 꼭두선이,
누이의 수틀을 보듯
세상은 보자
누이의 어깨너머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은 보자
울음은 해일
아니면 크나큰 제사와 같이
춤이야 어느 땐들 골라 못 추랴
멍멍히 잦은 목을 제 쭉지에 묻을 바에야
춤이야 어느 술참 땐들 골라 못 추랴
긴 머리 자진머리 일렁이는 구름 속을
저, 울음으로도 춤으로도 참음으로도 다하지 못한 것이
어루만지듯 어루만지듯
저승 곁을 날은다.
석문/조지훈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년이 지나도 눈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우는 이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까?
당신이 남긴 푸른 도포자락으로 이 눈물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감을 어찌합니까?
몇만 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흰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허공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않는 돌문이 있습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
픈 비바람에 낡아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불혹의 연가 / 문병란
어머니
이제 어디만큼 흐르고 있습니까
목마른 당신의 가슴을 보듬고
어느 세월의 언덕에서
몸부림치며 흘러온 역정
눈 감으면 두 팔 안으로
오늘도 핏빛 노을은 무너집니다.
삼남매 칠남매
마디마디 열리는 조롱박이
오늘은 모두 다 함박이 되었을까
모르게 감추어 놓은 눈물이
이다지도 융융히 흐르는 강
이만치 앉아서 바라보며
나직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보셔요. 어머니
나주벌 만큼이나 내려가서
3백리 역정 다시 뒤돌아보며
풍성한 언어로 가꾸던 어젯날
넉넉한 햇살 속에서
이마 묻고 울고 싶은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흐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새끼 네명을 키우며
중년에 접어든 불혹의 가을
오늘은 당신 곁에 와서
귀에 익은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아직도 다하지 못한
남은 사연이 있어
출렁이며 출렁이며 흐르는 강
누군가 소리쳐 부르고 싶은
이 간절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목마른 정오의 언덕에 서서
내 가슴 가득히 채우고 싶은
무슨 커다란 슬픔이 있어
풀냄새 언덕에 서면
아직도 목매어 흐르는 강
나는 아득한 곳에서 회귀하는
내 청춘의 조각배를 봅니다.
이렇게 항상 흐르게 하고
이렇게 간절히 손을 흔들게 하는
어느 정오의 긴 언덕에 서서
어머니, 오늘은
꼭 한번 울고 싶은 슬픔이 있습니다.
꼭 한번 쏟고 싶은 진한 눈물이 있습니다.
꿈이야기 / 조지훈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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