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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방/유명시

[스크랩] 시인 연구

by 미스커피 2011. 1. 24.

노천명의 생애와 시세계

1. 노천명의 생애

노천명은 1912년 9월 1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다. 소지주인 그의 아버지가 인천 등지에서 무역업에 성공을 거둔 덕분에 한 동안 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위로 아들이 하나 있음에도 잇달아 딸이 태어나자 부모는 아들 낳기를 바란 나머지 천명에게 사내아이의 옷을 입혀 키우고. 아명은 기선인데, 여섯 살 되던 해 홍역을 심하게 앓고 난 뒤 천명(天命)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올렸다.

1918년 아버지가 숨지자 그의 가족은 고향인 황해도 장연을 떠나 서울로 이주했다. 천명은 진명여고보에 진학하여 육상선수로 활약하면서 전국 대회 우승도 했다.

4년 동안 내내 기연처럼 같은 반의 같은 책상에 앉았다. 천명은 두뇌가 명민해서 성적도 우수한 편이었으나 수학은 떨어졌다. 몸이 건강하지도 않았는데 1백미터 달리기 선수였고 시를 잘 써서 학생들 앞에서 낭독을 하곤 했다. 성격은 괴팍해서 신경을 건드리면 자리에서 벌떡 소리를 지르며 일어서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러한 성격이 그의 독특한 시 세계를 이뤄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1930년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는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외롭고 쓸쓸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졸업후 조선중앙일보, 매일신보, 서울신문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였고, 1938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5년 동인지 시원에 ,내 청춘의 배는, 을 게재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그는 첫번째 시집 ,산호림, (1938)으로 작가의 위치를 굳혔다.

천명은 일제 말기에 일제의 대륙침략 정책에 동조, 문학과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1939년 '황군위문 작가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다수의 친일시를 발표하기도 했다.6.25가 터지면서 노천명은 일생 일대의 위기를 맞는다. 서울에 남아있던 그는 북에서 온 임화, 김사량 등과 만나게 되어, 좌익 성향의 조선문학가 동맹 가입 사실과 얽히면서 죄가 가중되어 20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부역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던 천명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시인 김광섭에게 "3월 2일까지 나를 구하라"는 명령투의 편지를 보낸다. 김광섭이 누하동 천명의 집에 방 두 칸을 얻어서 살 때의 친분이 이런 결례조차 서슴지 않게 만든 것이다. 천명은 문인들이 진정서와 김광섭, 이헌구의 노력으로 6개월 만에 출감한다.

천명의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사랑. 대상자는 당시 보성 전문 교수였던 김광진이었다. 어떤 분의 소개를 받아 첫 인사에 서로가 좋은 인상을 남겨. 그후 자주 만나면서 그들의 사랑이 깊어져 사람들은 그들이 결혼 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미리 마음속으로 축복하였다. 그러나 불과 같이 열렬히 사랑하던 김광진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나중에 김광진은 본처와 헤어지기로 하고 천명과 약혼까지 하지만, 그 결혼은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본처와의 이혼이 지연되면서 천명과 헤어진 김광진은 나중에 기생 왕수복과 월북하게된다.

이후 천명은 고아인 '인자'를 데려다가 친딸처럼 키우며 독신으로 살았다.

자존심이 무척 세고 몸이 약하던 노천명은 1957년 3월 길에서 쓰러져 재생 불능성 빈혈 이라는 병명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입원비 때문에 궁지에 몰려있다는 소식을 듣고 문우들이 도와주려했으나 천명은 "내가 거진 줄 아니?"하고 싸늘하게 거절을 하였다고 한다. 친구 모윤숙의 부축을 받아 코로나 승용차로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온 것이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외출이었다. 1957년 6월 16일 새벽 천명은 마흔 여섯의 나이에 서울 종로구 누하동 집에서 비운에 삶을 살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년 후 유고시집 <<사슴의 노래>>가 발간되었고, 1960년 유족들에 의하여 <<노천명 전집>>이 발간되었다.

2. 노천명의 시세계 특징

어린 시절 살았던 환경적 요인과 독신녀로서 고독하게 살다 간 생애사적 편력 등이 정한의 정통성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고 8세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모친의 고향인 서울로 이주하여 고향을 떠난 그때부터 낙원은 상실되었다. 때문에 노천명은 20년 동안의 시작활동에 줄기차게 고향회귀와 향토적인 전원의 세계를 갈구하고 그리워했다

노천명의 시에서 절대고독과 구원의지가 돋보이고 유독 고독은 더욱 뚜렷하게 노래되면서 향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승화된다. 그의 시에는 고독이 바탕되지 않은 시가 없을 정도로 보편화의 한 편향성을 보이고 있다. 노천명은 그의 시를 통하여 고독을 친구처럼 담담하게,그리고 친숙하게 부르면서 자신의 지향성을 향해 찾아나서는 예리한 감각과 청순한 삶의 전부를 보여 주고 있다.

노천명은 현대 한국 여성시인 가운데 가장 많이 논의되고 연구되어 왔던 시인이었

다. 그러나 그 논의는 최재서의 극찬을 시작으로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오류를 가져

오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통칭되고 있는 감정의 극기 외에 응

축된 열정이 그의 많은 시편에 넘쳐 있으며 사회비판과 방랑성을 엿보이면서 궁극

적으로는 자기애와 세계를 향한 열림의 친화력을 보여 주고 있다.

3.주요작품

첫 시집 (1938)에서는 유년을 회상하며 향수의 세계를 그려낸<산호림>, 고독한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을 그린 <자화상> <사슴> 1945년 두 번째 시집 <창변>고독·애수·향수가 짙은 <산호림>지. 향토적이고 건강함과 소박함은 고독을 노래한 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 옥중시로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 1958년 유작시집으로 <사슴의 노래>를 <유월의 언덕>에서는 <사슴>에서보다 훨씬 짙은 고독과 애수가 엿보인다.

<남사당패>는 남자들의 세계를 보여 주는 작품이면서도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감옥에 갇힌 자로서 느끼는 온갖 감정이 너무나 솔직하게 그려져 있어 시라기 보다는 차라리 산문이나 일기같은 <고별>. 오월에 느끼는 서정을 노래하고 있는 <푸른 오월>

푸근한 인정이 넘치는 고향을 그린 <장날 >여성의 감수성이 드러난 절제된 내면의 <싱가폴 함락>허무에 이르는 길이 되고 말았으며, 그것은 죽기 직전에 쓴 시 <나에게 레몬을>에 잘 나타

출처 : 시울림
글쓴이 : 풍금소리 원글보기
메모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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