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위원회에서 선정한
국민애송시 70편
(가 나 다 순)
1. 강은교 / 우리가 물이 되어
2. 고 은 / 문의 마을에 가서
3. 권혁웅 / 애인은 토막난 순대처럼 운다
4. 기형도 / 빈집
5. 김남조 / 겨울바다
6. 김사인 / 노숙
7. 김소월 / 초혼
8. 김수영 / 풀
9. 김선우 / 민둥산
10.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11. 김용택 / 섬진강1
12. 김종길 / 성탄제
13. 김종철 / 해 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14. 김종해 / 바람부는 날
15. 김지하 / 타는 목마름으로
16. 김춘수 / 꽃
17. 김후란 / 눈의 나라
18. 김혜순 / 생일
19. 나희덕 / 와온에서
20. 노천명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21. 도종환 / 담쟁이
22. 문정희 / 나의 아내
23. 문태준 / 맨발
24. 박두진 / 청산도
25. 박목월 / 가정
26. 박인환 / 목마와 숙녀
27.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강
28. 박형준 / 입술
29. 박희진 / 나의 애인
30. 백석 /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31. 서정주 / 자화상
32. 성찬경 / 거리가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33. 신경림 / 농무
34. 신달자 / 끈
35. 안도현 / 가마우지
36. 오규원 / 한 잎의 여자 1
37. 오세영 / 원시
38. 오탁번 / 그 옛날의 사랑
39. 유안진 / 자화상
40. 유치환 / 행복
41. 윤동주 / 별헤는 밤
42. 이가림 / 바지락 줍는 사람들
43. 이건청 / 하류
44. 이근배 / 독도 만세
45. 이상 / 거울
46.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47. 이수익 / 우울한 샹송
48. 이육사 / 광야
49. 이정록 / 의자
50. 이형기 / 낙화
51. 장석남 / 망명
52. 정일근 /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53. 정지용 / 향수
54. 정진규 / 연필로 쓰기
55. 정현종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56. 정호승 / 서울의 예수
57. 정끝별 / 강그라 가르추
58. 조병화 / 오산 인터체인지
59. 조지훈 / 승무
60. 조정권 / 산정묘지1
61. 최동호 / 반구대 향유고래의 사랑노래
62. 최승자 / 해남 대흥사에서
63. 최정례 / 생각의 까마귀떼라
64. 천상병 / 귀천
65. 천양희 / 우표 한 장 붙여서
66. 한용운 / 님의 침묵
67. 허영자 / 친전
68. 허형만 / 겨울 들판을 거닐며
69. 홍윤숙 / 장식론 1
70. 황동규 / 즐거운 편지
선정위원회에서 선정한 국민애송시 70편 (가 나 다 순
1. 강은교 /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라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2. 고 은 / 문의 마을에 가서
겨울 문의 마을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미른 소리로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태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3. 권혁웅/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찹쌀순대 2층, 순대 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그는 눌린 머릿고기처럼 얼굴을 눌러
눈물을 짜낸다
새우젓이 짜부라든 그의 눈을 흉내 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
연애의 길고 구부정한 구절양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빨래판에 치댄 표정이 되었지
융털 촘촘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빠져 있다
지금 마늘과 깍두기만 먹고 견딘다 해도
동굴 같은 내장 같은
애인의 목구멍을 다시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버릇처럼 애인의 얼굴을 만지려다 만다
휴지를 든 손이 변비 앞에서 멈칫하고 만다
4. 기형도 /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어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5. 김남조 / 겨울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데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6. 김사인 / 노숙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었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7. 김소월 /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8. 김수영 /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9. 김선우 / 민둥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로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10. 김영랑 /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11. 김용택 / 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쌀밥 같은 토끼풀꽃,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어둠을 끌어다 죽이며그을린 이마 훤하게꽃등도 달아 준다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 보면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고갯짓을 바라보며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12. 김종길 / 성탄제
어두운 방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 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13. 김종철 /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내 고향 늙은 미루나무를 만나거든
나도 사랑을 보았노라고
그대처럼 하루하루 몸이 벗겨져 나가
삶을 얻지 못한하는 병을 앓고 있다고 일러주오
내 고향 잠들지 못하는 철새를 만나거든
나도 날마다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으로 짐을 옮겨지으며
눈물 감추는 법을 알게 되었다고 일러주오
내 고향 저녁바다 안고 돌아오는 뱃사람을 만나거든
내가 낳은 자식에게도 가는 길과
썰물로 드러난 갯벌의 비애를 가르치라고 일러주오
내 고향 홀로 집 지키는 에미를 만나거든
밤마다 꿈속 수백 리 걸어 당신의 잦은 기침과
헛손질로 자주자주 손가락을 찔리우는 한 올의 바느질을 밟고
울며울며 되돌아 온다고 일러주오
내 고향 유년의 하느님을 마나거든
기도하는 이어진 도시의 언어와 한 잔의 쓴술로
세상을 용케 참아온 이 젊음을
용서하여 주어라고 일러주오
내 고향 떠도는 낯선 죽은을 만나거든
나를 닮은 한 낮선 죽음을 만나거든
나의 당에 죽은 것까지 다 내어놓고
물 없이 만나는 떠돌이 바다의 一泊까지 다 내어놓고
이별이별이별의 힘까지 다 내어놓고
자주자주 길을 잃는 이 젊은 유랑의 슬픔을 잊지 말아 달라고 일러주오
14. 김종해 / 바람 부는 날
오늘따라 바람이
저렇게 쉴새없이 설레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풀잎에
나뭇가지에
들길에 마을에
가을날 잎들이 말갛게 쓸리듯이
나는 오늘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희고만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아 지금 바람이
저렇게 못견디게 설레고만 있음은
오늘은 또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고 있음을
바람도 나와 함께 안다는 말일까.
15. 김지하 /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내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6. 김춘수 /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7. 김후란 / 눈의 나라
겨울이면 나는 눈의 나라 시민이 된다
온 세상 눈이 다 이 고장으로 몰린다
고요하라 고요하라
희디 흰 눈처럼
차고도 훈훈한 눈처럼
고요하라는 계율에 순종한다
사랑을 하는 이들은
안개의 푸른 발
이사도라 던컨의 맨발이 되어
부딪치는 불꽃이 된다
겨울이면 나는 눈의 나라 시민이 되어
유순하게 날개를 접는다
그러나 이따금 불꽃이 되고
허공에서 눈물이 되려 할 때가 있다
슬픔이 담긴 눈송이들끼리
18. 김혜순 / 생일
아침에 눈 뜨면
침대에 가시가 가득해요
음악을 들을 땐
스피커에서 가시가 쏟아져요
나 걸어갈 때
발밑에 떨어져 쌓이던 가시들
아무래도 내가 시계가 되었나 봐요
내 몸에서 뾰족한 초침들이
솟아나나 봐요
그 초침들이
안타깝다
안타깝다
나를 찌르나 봐요
밤이 오면 자욱하게 비 내리는 초침 속을 헤치고
백 살 이백 살 걸어가보기도 해요
저 먼 곳에
너무 멀어 환한 그곳에
당신과 내가 살고 있다고
행복하다고
당신 생일날
그 초침들로 만든 케이크와 촛불로
안부 전해요
19. 나희덕 / 와온에서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흙에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20. 노천명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 하겠소
21. 도종환 / 담쟁이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22. 문정희 / 나의 아내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 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 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23. 문태준 /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늘 맨발이었을 것이다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아― 하고 지이 울 때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24. 박두진 / 청산도
산아. 우뚝 속은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 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 질 봄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어릴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별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25. 박목월 / 가정
지상에는아홉 켤레의 신발.아니 현간에는 아니 들깐에는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십구문반(十九文半).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그들 옆에 벗으면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귀염둥아 귀염둥아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여기는지상.연민한 삶의 길이어.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아홉 마리의 강아지야강아지 같은 것들아.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내가 왔다.아버지가 왔다.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아니 지상에는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존재한다.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26. 박인환 / 목마와 숙녀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해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목마는 하늘에 있고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가을 바람 소리는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27. 박재삼 / 울음이 타는 가을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28. 박형준 / 입술
봄날 대낮
공기의 서랍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냄새 맡아요
따끈하게 데워진 술이
이슬로 내리는 햇살 사이 걸어갈 때
입술로만 말을 해봅니다
미래의 문들이 달린 창공을 향해
뿔나팔을 분답니다
가냘픈 바람의 허리를 붙잡고
당신의 귀밑에 부어넣어지는
밀어의 전언을 느껴보세요
거리를 향해 심호흡을 하고
조율한 휘파람을 날려보냅니다
당신의 옷자락에 살랑이는,
입술의 언어를 느껴보세요
29. 박희진 / 나의 애인
나의 애인은 말이 없습니다.
나의 애인은 공기의 혀와
안개의 살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의 애인은 이 몸이 아파야
홀연 바람처럼 나타납니다.
나의 애인의 별빛 눈동자를
본 이는 세상에 나밖에 없습니다.
나의 애인은 껴안을수록
아주 속절없이 사라져버립니다.
나의 애인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때는
내가 홀로 이만치 서서
바라볼 때입니다.
나의 애인의 목소리를 꼭 한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끼 낀
돌 틈을 흐르는 물 소리 같았어요.
나의 애인은 때로 한낱
미미한 향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30. 백석 /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것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낮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 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 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 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대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 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굻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31. 서정주 /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어떤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볕이거나 그늘이고나 혓바닥 늘어뜨린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32. 성찬경 / 거리가 우주를 장난감으로 만든다
알맞게 구름이 끼어 있으면 해도 잘 익은 감 정도여서 오래 보며 놀 수 있다. 사실은 지구에서 해까지 광속으로 8분 걸리는 거리 덕택으로 해가 저렇게 예뻐 보이는 것이다. 개똥벌레의 정기총회 같은 하늘의 별자리. 구경 치곤 세상에서 으뜸이다. 그러나 저 별까지의 엄청난 광년의 거리가 있기에 무시무시한 불덩어리들의 모임이 저러한 신비의 향연이다. 거리만 있다면야 장비도 골리앗도 무서울 게 없다. 막 폭발한 성운의 사진이 영혼의 심부까지 스미는 추상화다. 직업 화가를 난처하게 만드는. 거리가 있기에 우주 구석구석이 서로 재미나는 장난감이다.
33. 신경림 /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이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34. 신달자 / 끈
내가 건너온 강이 손등 위에 다 모여 있다
무겁다는 말도 없이 손은 잘 받아 주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꽤 수척해 있다
톡톡 튀어나온 강줄기가 순조롭지 않았는지
억세게 고단하게 보인다
허겁지겁 건너오느라 강의 성도 이름도 몰라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하는데
뭐 이름을 알아 무엇하냐며 손사래를 치는 것인지
퍼런 심줄 줄기가 거칠게 겉늙어 보인다
그 강의 이름을 그냥 끈이라 하자
날 놓지 못하고 기어이 내 손등까지 따라와
소리 없이 내가 건넌 세월의 줄을 홀쳐 매고 있으니
자잘한 잔물결이 손등 전체에 퍼져
내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세월의 주름은 더 깊게
내 손을 부여잡고 있다
그 세월 손아귀 힘이 장난 아니어서
아예
35. 안도현 / 가마우지
해안선을 잘 엮어서 어머님께 보여드리자
밤새 젖은 모래톱 한 두름 꾸덕꾸덕하게 말려 굽고
시끄러운 파도 소리 살짝 볶아 쟁반에 담아서
어머님의 서러운 아침 밥상에 올리자
해안선을 올리자 어머님을 위하여
허공을 깎아 만든 절벽의 집으로도 가지 못하고
바다의 밑바닥으로도 이제 갈 수 없는
검은 해안선에 몸이 감긴 어머님
최대한 목을 길게 빼고
가마우지, 가마우지 공중에서 울자
36. 오규원 / 한 잎의 여자 1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프레 나무 한 잎 같이 쬐끄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도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같은 슬픈 여자.
37. 오세영 / 원시
멀리 있는 것은아름답다.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멀리 있는 것은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아름답다.사랑하는 사람아,이별을 서러워하지 말라,내 나이의 이별이란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멀어지는 일일 뿐이다.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이제돋보기가 필요한 나이,늙는다는 것은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것이다.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안다는 것이다.
38. 오탁번 / 그 옛날의 사랑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햇살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 속에 살다가
우화羽化되어 하늘로 나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기는
추석 송편이 솔잎 내음 속에 익는 해거름
장지문에 창호지 새로 바르면서
따다가 붙인 코스모스 꽃잎처럼
그 때의 빛깔과 향기로 남아 있는가
물동이 이고 눈썹 훔치면서 걸어오던
누나의 발자욱도
배추흰나비 날아오르던
잘 자란 배추밭의 곧바른 밭이랑도
그 자리에 그냥 있는가
방물장수가 풀어놓던
빨간 털실과 오디빛 참빚도
어머니가 퍼주던 보리쌀 한 되만큼 소복하게
다들 그 자리에 잘 있는가
툇마루에 엎드려
몽당연필에 침 발라가며 쓴
단기 4287년 가을 어느 날의 일기도
마분지 공책에
깨알처럼 그냥 그대로 있는가
그 옛날의 사랑이여
39. 유안진 / 자화상
한 오십년 살고 보니나는 나는 구름의 딸이요 바람의 연인이라비와 이슬이 눈과 서리가강물과 바닷물이 뉘기 아닌 바로 나였음을 알아라
수리부헝이 울어대는 이 겨울도 한 밤중, 뒷뜰 얼음 밭을 치달리는 눈바람에, 마음 헹구는 연인, 가슴속 용광로에 불지피는 황홀한 거짓말을, 오오 미쳐볼 뿐 대책 없는 불쌍한 희망을, 내 몫으로 오늘 몫으로 사랑하여 흐르는 일
삭아질수록 새우젓갈 맛나듯이, 때얼룩에 쩔을수록 인생다워지듯이, 산다는 것도 사랑한다는 것도, 때 묻히고 더럽혀지며, 허상에 넋을 잃어 진실을 놓치며, 죄업에 혼이 빠져 정직을 못 가리며, 어디론가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다
나란히 누웠어도 서로 다른 꿈을 꾸며, 끊임없이 떠나고 떠도는 것이다, 멀리 떠나갈수록, 가슴이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다, 갈 데까지 갔다가는 돌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만이 살 곳은 아니다, 허공이 오히려 더 살만한 곳이며, 흐르고 떠도는 것이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돌아보지 않으리문득 뒤 돌아다 보니나는 나는 흐르는 구름의 딸이요떠도는 바람의 연인이었어라.
40. 유치환 /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니. 세상에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크러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41. 윤동주 / 별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이제 다 못 헤는 것은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憧憬)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42. 이가림 / 바지락 줍는 사람들
바르비종 마을의 만종같은
저녁 종소리가
천도봉숭아 빛깔로
포구를 물들일 때
하루치의 이삭을 주신
모르는 분을 위해
무릎 꿇어 개펄에 입 맞추는
간절함이어.
거룩하라.
호미 든 아낙네의 옆모습
43. 이건청 / 하류
거기 나무가 있었네. 노을 속엔 언제나 기러기가 살았네. 붉은 노을이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면 거기 나무를 세워두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네. 쏟아져 내리는 은하수 하늘 아래 창문을 열고 바라보았네. 발뒤축을 들고 바라보았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희미한 하류로 머리를 두고 잠이 들었네. 나무가 아이의 잠자리를 찾아와 가슴을 다독여 주고 돌아가곤 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일만 마리 매미 소리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네. 모든 대답이 거기 있었네. 그늘은 백사장이고 시냇물이었으며 삘기풀이고 뜸부기 알이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이제는 무너져 흩어져 버렸지만 둥치마저 타 버려 재가 돼 버렸지만 금관악기 소리로 퍼지던 노을 스쳐가는 늦기러기 몇 마리 있으리. 귀 기울이고 다가서 보네. 까마득한 하류에 나무가 있었네. 거기 나무가 있었네.
44. 이근배 / 독도 만세
하늘의 일이었다
처음 백두대간을 빚고
해 뜨는 쪽으로 바다를 앉힐 때
날마다 태어나는 빛의 아들
두 손으로 받아 올리라고
여기 국토의 솟을대문 독도를 세운 것은
누 억년 비, 바람 이겨내고
높은 파도 잠재우며
오직 한반도의 억센 뿌리
눈 부릅뜨고 지켜왔거니
이 홀로 우뚝 솟은 봉우리에
내 나라의 혼불이 타고 있구나
독도는 섬이 아니다
단군사직의 제단이다
광개토왕의 성벽이다
바다의 용이 된 문무대왕의 뿔이다
불을 뿜는 충무공의 거북선이다
최익현이다, 안중근이다, 윤봉길이다
아니 오천년 역사이다
칠천만 겨레이다
누가 함부로
이 성스러운 금표禁標를 넘보겠느냐
백두대간이 젖을 물려 키운 일본열도
먹을 것, 입을 것을 일러주고
말도 글도 가르쳤더니
먼 옛날부터 들고양이처럼 기어와서
우리 것을 빼앗고 훔치다가
끝내는 나라까지 삼키었던
그 죗값을 치르기도 전에
어찌 간사한 혀를 널름거리는 것이냐
우리는 듣는다
바다 속 깊이 끓어오르는
용암의 소리를
오래 참아온 노여움이
마침내 불기둥으로 솟아오르려
몸부림치는 아우성을
오냐! 한 발짝만 더 나서라
이제 독도의 활화산이 되어
일본 열도는 침몰시키리라
아예 침략자의 종말을 보여주리라
그렇다
독도는 사랑이고 평화이고 자유이다
오늘 우리 목을 놓아 독도 만세를 부르자
내 국토의 살 한 점 피 한 방울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서로 얼싸 안고 부둥켜안고
영원한 독도선언을 외치라
하늘도 땅도 바다도 목청을 여는
독도 만세를 부르자
45. 이상 /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괘닮았소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46.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47. 이수익 / 우울한 샹송
우체국에 가면잃어버린 사랑을 찿을 수 있을까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비애(悲愛)를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찿는다면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돌아올까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그 꽃들은 바람에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사람들은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위에애정(愛情)의 핀을 꽃고 돌아들 간다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어리는데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읽질 못하고우체국에 가면잃어버린 사랑을 찿을 수 있을까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기진한 발걸음이 다시도어를 노크하면,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48. 이육사 /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49. 이정록 /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 께서
한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있다가 침맞고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아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군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낳고 사는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50. 이형기 /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봄 한철격정(激情)을 인내한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분분한 낙화······결별(訣別)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지금은 가야 할 때,무성한 녹음과 그리고머지않아 열매 맺는가을을 향하여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헤어지자섬세한 손길을 흔들며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나의 사랑, 나의 결별,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내 영혼의 슬픈 눈.
51. 장석남 / 망명
어둡는데
의자를 하나 내놓으면
어둠 속으로 의자는 가겠지
어둡는데
꽃 핀 화분도 하나 내놓으면
어둠 속으로 꽃도 잠겨가겠지
발걸음도 내놓으면 가져가겠지
어둠은 그렇게 식구를 늘려서 돌아가
어둠을 오가는 넋에게도 길 닦아주고
견고한 잠 속에는 나라를 세우고 나머진
빛으로 돌려 보낼 터
어둡는데 길을 나서면
한 줌 먼동으로 돌아올 터
어둠에 살을 준다
사랑에 살을 준다
52. 정일근 /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기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기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삽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ㅡ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53. 정지용 /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옓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돝아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긴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가 까마히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54. 정진규 / 연필로 쓰기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55. 정현종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56. 정호승 / 서울의 예수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들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술잔을 들고 어둠 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57. 정끝별 / 강그라 가르추
한밤을 가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밤을 맨발로 달려가자 모든 죄를 싣고
검은 야크의 눈에 서른 개의 달을 싣고
강그라 가르추를 가자 가다 갇히면
덧창문 안으로 강된장을 끓이며 몇 날 며칠
오랜 슬픔에 씨앗만 해진 두 입술로
뭉쳐진 밥알을 나누며 숨죽이며 가자
얼음 냄새 밴 발꿈치를 어루만지며
몇 날 며칠을 가자 버리고 도망 온 것들이
가랑가랑 뜨물처럼 갈앉는 꿈에서야
눈보라에 튼 붉은 뺨을 씻으며
처마 밑 고드름 녹는 소리에
겨울 순무의 푸른 귀가 돋는 곳으로
가자 도망 온 것들이 그리워지는 곳으로
가까스로 도망 온 도망갈 곳으로 가자
강그라지듯 가자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너라는 천산산맥 나라는 만년설산을 넘어
가도 가도 강그라 가르추를 다시 넘어
58. 조병화 / 오산 인터체인지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59. 조지훈 / 승무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박사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빰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60. 조정권 / 산정묘지 1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 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그러나 한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뭍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 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든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여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 더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 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61. 최동호 / 반구대 향유고래의 사랑 노래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머리에 이고
외롭게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머리통에 가득 저장한
새우 기름의 풍요로운 향기가
바람을 타고 바다 멀리 퍼져 나가
작살을 든 인간의 추격을 피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비극적 운명이다.
선사시대 향유고래가 살아 있는 암각화,
춤추는 샤만과 함께 하늘에 제를 올리던 고대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고래의 형상을 신성한 바위에
새겨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머리통에 향유를 가득 담고 한 눈 뜨고 잠자는
이 종족들의 슬픈 사랑의 전설을 그들도
구전하는 옛 노래를 통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북방의 비바람을 타고 바다 멀리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소리를 증폭시키는 시그널처럼
향유고래 이빨 피리로
떠도는 망자의 혼을 불러놓고 천지신명 앞에
경건한 제물을 바치던
선사시대 사람들도 그들의 생애가, 낮은
휘파람 소리를 듣고 멀리 있는 연인을 찾아가다
죽음을 맞이하는 향유고래처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상처 받는 것이
그들이 살아야 할 삶이라 해도
끝내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할
운명임을 알았을 것이니, 그
운명적 사랑의 최후를 기리기 위해
새끼 업은 고래의 형상을 바위에 새기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탄의 노래를 하늘을 향해 길게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반구대는 흙먼지에 휩싸이고
망자의 영혼을 기리는 축제와 향연은
돌이킬 수 없는 망각의
바위틈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랑과 죽음을 하늘에 고하던 신성한 옛 노래는
아득한 전설의 바위 속에서만 메아리쳐
메마른 세속의 도시를 달리는 인간의 비애는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의 향기로
멸종되어 가는 향유고래처럼,
사랑 없는 사랑의 슬픈 노래를
가슴 가득 채우고 살면서도, 얼굴 없는 얼굴의
추적자와 의연하게 맞서야 하는
오늘의 삶을 위해 한
순간을 영원처럼 노래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62. 최승자 / 해남 대흥사에서
깊은 밤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고 우리의 손은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찾는다. 우리 몸 속에서 오래 잠자던 물살이 문득 깨어나 흐르고 비가 오리라 바다 건너서 그대의 땅을 적시며, 산사의 계곡 하늘의 빈 술잔엔 서푸른 취기의 바람이 일렁이고 지금 어느 산맥 뒤에서 두 연인의 손이 만난다.
63. 최정례 / 생각의 까마귀떼라
나의 밤이 너에겐 낮아지고
나의 낮이 나에겐 밤이라
우리 사이엔 거대한 태평양이
누워서 파도친다
끝도 없이 캄캄한 해안가로
난폭하고 순결한 물결이
무슨 뜻을 품고 굽이쳐 오는 것만 같은데
사실 무슨 뜻이 있겠는가
내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너를 향해
전화기를 들었다 놓는 것과 같다
잠시 다른 밤 다른 낮을 살고 있는
남의 나라에서
내 나라를 향해 한껏 밀려갔다가
다시 돌아서 밀려오는데
셀 수도 없는 내가 거기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파도에 굴러다니는 태초부터의 자갈돌처럼
생각의 까마귀떼라
얼굴도 몸통도 어깻죽지도 두 팔도 무너지면서
64. 천상병 /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65. 천양희 / 우표 한 장 붙여서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66. 한용운 /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처럼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기에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일인 것 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67. 허영자 / 친전
그 이름을
살 속에 새긴다
암청의 문신
불가사의의 윤회를 거쳐
마침내
내 영혼이 고개숙이는 밤이여
무거운 운명이여
절망의 눈비
회의의 미친 바람도
숨죽여 좌선하는 고요
“사랑합니다”
참으로 큰
슬픔일지라도
어리석은 꿈일지라도
살 속에
그 이름을 새기며
이 봄밤
눈떠 새운다.
68. 허형만 / 겨울 들판을 거닐며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당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69. 홍윤숙 / 장식론 1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은 무우 같다든지 뛰는 생선 같다든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보면 쇼우인도우에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을까 이 삐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 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 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장의 낙엽처럼 쓸쓸하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70. 황동규 /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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