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study방/詩 공부

[스크랩] 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

by 미스커피 2013. 1. 18.

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1>




1. 현대시란 무엇인가?


시(詩), 말씀언(諺) 곁에 절사(寺)자를 결합한 결합문자, 이가 글시자(字) 인데, 하필 이 글자를 시라는 형용의 말머리로 쓰이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아마도 짐작키에는 이럴 것같다.
시란 언어 매체를 통해서 고요속에 몰입하는 형태문학이라는 뜻 일 것같다.
정막함의 길은 바로 시이다. 시란 그러므로 깨우침의 무한한 연상작용에서 일어나는 도량인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자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없이 논의되어 온 것이다.
진리란 하나라고 하지만 그 의미를 헤아리기란 깨알 만한 존재 하나라도 수많은 갈래로 이어지고 결합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언어적 의미적 추적을 게을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궁국적으로 인간의 고뇌의 한 줄거리이기 때문이다.
시란 무엇이냐고 토의를 한다해도 이것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비록 그 본분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 한다 손 쳐도 계속해서 추리해야만 옳은 것이다.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속성을 추적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측면을 설명해 주는 이해의 역할성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시의 길은 등불처럼 밝아지는 것이다.
어찌보면 까다롭고, 황당하기도 한 도정이다.

어쩌커나 시의 근원은 우주자연의 본바탕위에 있고 그 본질은 자연 존재의 생명에 있는 것이다. 이 시적 인간적 생명 카테고리라는 것은 자로 재거나 저울로 달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판을 놓고 따져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로 생각으로 설명하고 구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시는 해명불가한 분석 불가한 존재라는 것일 따름이다.
이렇게 볼 때 시의 정의(定義)를 내린다는 것은 소경이 코키리 코를 만지고 이렇더라 하는 격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시를 말한다는 것은 誤謬의 誤意에 이른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엘리어트도 다음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해나 <달과 같이 저렇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 자체를 말하려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 노릇이랴고,> 그렇다고 이 자체를 방치해 놓고 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원래 시(Poetry)라고 하는 것은 영어의 희랍어에 행(行)을 만든다라는 뜻이고 만든다-창조한다. 는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독일어에서는 시(Dichtung)응축이라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같이 시란 의미상의 응축과 언어상의 음율을 가미한 하모니라는 점이다.
시란 말 자체가 어렵다는데서 부터 철학성의 고집을 강조하거니와 시속에는 음율적 템토리즘의 암시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시의 정의는 그만큼 어렵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시라고 하는 뜻은 그 의미상으로 고찰 할 때 서구에서는 포엠(Poem)이라고 한다든지 포에트리(Poetry) 또는 포에지(Poesie)라 지칭하는 두 갈래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좀더 쉽게 설명한다면 흔히 읽는 시의 형식을 말하는 것인 반면 포에트리라고 하는 형식어는 시 이전에 시적 감정을 포유(包有)하고 있는 상태, 즉 마음속으로 시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포에트리는 형식이전의 산물이라는 것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포엠은 이미 시로서 승화되어 형식미를 갖춘 형태인 것에 반하여 포에트리는 얼굴없는 시의 소재. 영상. 환상. 생각. 가시적 현상. 의미의 내재. 영감적 사유. 상상적 사상 등을 일컷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엠은 외형상의 형식을 다 갖춘 상태라는 정의를 내린다면 될 것이라고 본다.
포엠과 포에트리는 유형의 시와 시가 아닌 무형의 대립관계인 구별인 것이다.
우선 엣세이컬한 것과 포에틱 과의 대조적인 관계를 놓고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산문과 시의 특정한 형식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시는 단축 응축의 산물로서 탄생하여 형식을 갖춘바라면 산문은 이를 설명하는 문장구의 형태를 이룩한다.
일종의 시를 해설하는 설명문으로서 가능할 것이다.
산문의 위치는 시 그 자체를 직설하는 부분이 아니라 시를 해설 분석 의향 등을 자세하게 이해시키려는 문장으로서 가능해지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간혹 산문시라고 하는 장르가 있기는 하나 그렇다고 산문시가 시를 해설하는 역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고, 시 자체로서의 입장에 엄연히 서야 하는 것이 산문과 산문시와의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긴 산문을 행만을 바꾸어서 단락단락 토막내어 시라고 한다면 그건 아이러니 일 것이다.
예로서 긴 대다나무를 잘라서 토막토막 리드미컬하게 음용(吟用)하기 알맞게 배열하고 그것을 연뿌리를 잘라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로서의 형식면에서는 시의 속성이라고는 할 수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 면에서는 말도 안되는 터이다.

아래는 시인 박정온(朴定溫)의 시에 형식과 본질에 대하여 설명한 문구이다.
도저히 시라고 생각 할 수 없는 잠언(箴言), 성서나 경서의 경구(警句), 어느 광고문구의 시적 형태, 이런 것들은 형식면에서는 시의 속성을 본딴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시적 본질이라고는 간주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억(金億)의 봄바람과 空超 오상순(吳相淳)의 <한잔 술>을 상고해 보면, 이 두 시인의 글 속에 형태는 뚜렷하다.
김억의 <봄바람>의 경우 7.5.7조의 정형시, 공초의 <한 잔술>에서는 7.5조의 음수율이다.
-봄바람이 휘몰아/꽃이 필 때면/다시 곰곰 옛생각/이하생략*-김억의 시이고 아래는 공초의 시인데...-
-나그네 주인이어 평안하시고/곁에 앉힌 술단지 그럴 듯 하네/한잔 가득부어서 이리 보내게/이하생략* 음수율과 정형시를 구분하여 보아도 이해가 될것이다.
시란 산문과 구별되는 점이 이런 것이고, 서구적 의미시, 즉 무형식의 시라 할지라도 그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고, 운율적 템포, 리드미컬성은 동일하다는 점이다. 다만 정형과 음수율과 일반적 자유시적 유희시는 음악성의 주안점이 아니라 의미성의 형태를 가진 유희의 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위의 두 작품은 음악적 공통점 외에는 읽는 이에게 주는 감동이란게 별로 없다. 그렇다고 특수한 이미지도 안겨주지 못한다. 단지 감정의 어떤 형태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어체시 형태, 즉 음악적 형태시, 그런 멋에만 치중된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시의 초기형태의 양상이요 약점인 것이다.
시적인 본질이 부족한 시로는 현대시라고 하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허다한 것이다.
요즈음 문학지나 인터넷에 올려지고 있는 시들의 대부분도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았는데 이것은 우리시의 원활과 폭넓은 과정을 배제하고 좁은 경지에서 낙후성을 면치 못한다는 안타까움인 것이다.

그러한 약점을 아래에서 설명해 보기로 한다. 아래의 시는 주요한(朱耀翰)의 <불놀이>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다.

출처 : 포엠스퀘어 [문학광장]
글쓴이 : 雲岩/韓秉珍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