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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방/詩 공부

[스크랩] 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3>

by 미스커피 2013. 1. 18.

3. 현대시란 무엇인가.


시라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기에 갖가지 구구한 해설을 안고 있는가, 참으로 이에 대한 해석은 난삽(難澁)스럽다.
그런데 먼저 내가 정의하고저 하는 바는 시란 인간의 靈驗的 미학이라고 하면 어떨까 한다.
그러나 미래 현재 과거를 분류해서 시를 해석한다면 진리적이라기 보다는 과거적인 면에서는 반성적, 현재적인 면에서는 실재성, 미래적인 면에서는 가시성, 시의 의식면에서의 세가지로 분류해 두면 어떨까 한다. 이렇게 분류해 보아도 역시 해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나의 견해 일 따름이고, 그간에 많은 시인들께서 시론을 언급한바가 많으니 이를 열거 소개 해 봄이 옳을 것같다.
(1)공자는 고전주의적 시관(詩觀)을 말하였는데 시를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 관점에서 그 효용적가치 내지 기능면을 강조한 바를 볼 수 있다.
시삼백일언폐지왈사무사(詩三百一言蔽之曰思無邪)라 일렀으니 시 삼백수를 한마디로 말해서 생각에 사(邪)함이 없느니라. 하였다. 공평무사하고 진실전달에 아무런 흠점이 없도록 읇은 것이라는 뜻도 된다. 다분히 철학적 의식을 안고 한 표현이다. 그러나 공리주의란 글자 그대로 공을 앞세워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의 공리주의는 유교적 사상에 입각한 많은 자기 공리적(功利的) 가치를 추구하고자 했다.
(2)엘리어트는 시에 대하여 상당히 자기 만족적 표현을 금치 않았다.
그가 말하기는 시는<고급적인 산물, 창조적인 향취, 흥취의 오락>등등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3)코올리지가 보는 시의 존재가치의 해설은 시를 쾌락적 전유물로 보았다.
그렇지만 이후로 낭만주의 시인들의 견해는 다분히 진지한 의식과 정서면 감정적 의식세계라는 면에서 시를 더욱 성찰의 심연으로 끌어들였다.
시의 내용을 정서라는 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 했다.
<시는 최선의 정신의 가장 행복이고, 최선의 가치적 찰나의 기록이다.
(5)워즈워드는 시란 숭고한 미적 정신에서 울어나오는 인간 본질의 열망이다라고 했으며, (6)쉘리는 <시란 용광로처럼 넘쳐흐르는 뜨거운 정감의 발로라고 하였다.
(7)보들레르는 미적 운율적 창조물>.(8)E A포우도 시란 미적 가치를 중시하였으며 선한 정서에서 축출한 액기스라고 보았다.
또한 (9)E .고스는 시란 지적 창조의 순수물, 즉 최고의 지적 가치의 창조물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밖에도 시에 대한 정의는 수 없이 많다. 시인 각자가 생각하고 내리는 정의란 다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를 형식적 구성적 면만으로 정의하려는 미국 뉴욕 크리티시즘의 정체도 현대시 전체를 설명하는 명해석은 못 된다 할 것이다.
어찌튼 우아하고 심미적인 시란 시인 스스로가 참다운 경지에 들어가서 파낸 시추물이어야 한다.
형식면이든 제재면(題材面)이든 관념과 철학적 의식이든 신비와 환상을 조합한 것이든 수많은 양상을 태어나게 하는 시적 탐색정신 가운데 각자가 자기의 시적 세계를 달견하는 정서감정에서 이룩된다는 말을 곁들이고 싶다.

<나는 시인이 되어서 마음이 더 고와졌다.
비단을 짜는 직녀같아라.
시인은 죽어서도 시로 말하고
그 영혼은 멀리 죽은 후에도
만인의 가슴속에 빛으로 날아다닌다.>
시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다. 나에게는 감성적 에너지원인 것이다.
어떻게 쓰는 시가 아름다운 시인가, 어떻게 쓴 시가 좋은 시인가, 시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해 봤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시 해설은 주마간산격이다.
하지만 시를 쓰는 기교에 있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상식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은 시 쓰기를 게을리하는격이나 마찮가지이다.
시를 이해 하는데 이런 문제를 제기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맹목적인 시를 쓴다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의식으로서 여러가지 思惱와 사유를 갖고있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생각이란 생각을 많이 할 수록 생각의 심도가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는 법이다.
그러면서 시를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많이 쓸려며는 많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많은 생각속에서 새로운 사유물이 탄생케 되는 것이다. 좋은 시란 그러면 무엇일까, 과연 그런 시가 있는 것일까, 나쁜 시는 어느 것일 까, 좋고 나쁘다라는 개념은 시인의 견지에서는 납득이 안가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독자의 각기 다른 취향에 따라서는 좋은 시가 존재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견해는 시인으로서의 통념상에 이치이다. 한편의 시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소재(이미지), 비유(메타포어), 운율(리드미컬), 그런 것들이 가로놓여 있다. 이 가로 놓인 상태에 시를 쓰는 작자는 혼을 불어 넣는다. 이 혼이란 시인의 시정신이요. 영혼적 소산일지라. 이것을 보는 눈은 여러가지 일 수 있다. 시인 자신도 시를 보는 눈의 독자도 각기 다른 시각을 가지고 느끼게 될 것이다. 시인은 시인대로의 독자적 감성에 산물이고, 독자는 독자대로 그 산물에 대한 感情偏入이다. 일치화가 될 수 없기에 그 느낌은 다를 수가 있다.
일정한 주제에 대하여 공감 할 수도 있고, 공감치 못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고 느끼는 시야에 따라서 마음에 들을 수도 있고 안들 수도 있다.
작자로서의 입장에서 보면 창작의도의 기교나 방법에 결과 문제이며, 독자로서는 간접체험으로서 생소한 상상력을 체험하게 된다는데 상이점이 있을 수 있다.
시인의 생각이 정위치라면 독자의 생각은 정반대 일 수도 있다.
시란 이처럼 다양성의 부산물이기 때문에, 상상력도 각자의 의식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좋은 시란 일정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항시 가변적이다. 이를테면 <미당>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용>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의 시적 성격 시인적 아류를 싫커나 선호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순수시를 좋아하는이가 있는가 하면, 참여시를 좋아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슈르적인 성향을 좋아 하는이가 있는가 하면 전위적, 포스트 모던이즘을 선호하는이도 있을 것이다.
요는 시를 이해하려는 독자의 생각이 중요한 관건이다.
우리는 한편의 시를 대 할 때 그 시를 놓고 자기의 생각과 대조하려 한다. 여기서 시의 진실을 얻고자 한다거나 마음을 안식하고자 한다거나 좋은 시를 만남으로서 자신의 의식을 지탱하려는 이지적 가치로 추구하려한다.
마음에도 없는 시를 찬양 할 바는 없다. 반면에 시인은 마음에도 없는 시어를 나열해서 쓴다고 할 때 그 시는 다른이의 공감대에도 전입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 잠깐 작고 선배 시인들의 작품을 두편 놓고 생각해 보자, <招魂>서럽다. 건망증이 든 都會야!/어제부터 살기조차 다----두엇대도/몇백 년 전 내 몸이 생기면 옛 꿈이나마나/마지막으로 한 번은 생각코나 말아라./서울아, 반역이 낳은 都會야!/-尙火-의 시이다.*
<序詩>죽느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아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의 시*/위의 시에서 두 시인의 작품을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질적 수준이나 가치를 제외한 독작의 일반적 선호도는 여실히 분별되어 진다.
물론 상화의 유명한 시<나의 침실로>등이 있지만 그런 작품을 두고도 전연 생소하게 익히지 못하고 있는 작품들도 있는 것이다.
위의 <초혼> 역시 소월의 <초혼>에 비하여 독자는 <소월>시 만큼은 익숙치 못하고 있다.
<지용>의 <서시>는 얼마나 많은 독자층을 외워싸고 있는 가, 한 사람의 작품에서도 이와같은 많는 親疏의 차를 느끼게되는 것이다. <지용>의 작품도 마찮가지고 <소월>의 작품도 마찮가지다. <미당. 다형. 석정. 용운> 그 외 많은 시인들의 시에서도 가까히 접해지지 않는 작품들이 있게 마련이고, 낯서른 시로서 영원히 남는 것들도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_

출처 : 포엠스퀘어 [문학광장]
글쓴이 : 雲岩/韓秉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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