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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방/詩 공부

[스크랩] 현대시의 이해와 시쓰기<4>

by 미스커피 2013. 1. 18.

2.현대시의 가능성과 미래상?

시인이 시를 쓰고 독자가 시를 읽는다. 당연한 논리이기는 하나, 요즘 세상에는 시인이 시를 쓰기는 하나 시를 읽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는 시를 읽는가?라는 질문에 확연한 답은 나오지 않는 형편이다.
시를 기호하는 층은 시인이고 시를 탐독하는 대상이 독자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독자가 시인일 수 있고 시인이 독자 일 수가 있다.
그 인구가 급격히 많이 늘어난다는 것이 현대 시단의 기류이다.
이것이 좋은 현상이기도 하고 나쁜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나 저러나 같은 맥락의 해설이기도 하다. 하나마나 한 소리를 왜 하는가? 굳이 설명을 부연한다면 시를 읽고 느낀다든가 생각한다든가 하는 인구수에 따라서 시의 복합적 기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시작업과는 무관한 내용이다.
그러면서도 청중이 많으면 연사의 설파력이 강해진다는 이치와 맞먹는 얘기로서 시인이 독자가 많으면 시를 쓰는 주체나 시를읽는 대상이 다 신바람이 난다는 뜻에서 이다.
이상은 사실 글 쓰기와는 상관 없는 객설이다. 시인의 시쓰기에 열성을 올리는 것이 그리 중요하다는 뜻일까, 그렇다. 남몰래 인고하고 고독하며 참을 성 있게 시를 탐색하고 신혈을 뚫어서 광맥을 찾는다.
이것이 시인의 단련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간다. 그 길을 가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때론 실성한 사람이 아닐까, 무엇이 보인다고 중얼중얼거리는 것일까, 하기야 무엇인가 보이기는 보이니까 중얼중얼거리는 것이겠지,
시인의 작업은 바로 이렇게 고단한 역정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시의 가치를 발견한다. 뼈를 깎는 산고 없이는 희열의 순간을 맛 볼 수 없으리라. 나는 한마디로 좋은 시가 갖추고 있는 조건은 반드시 이런 데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
현대시, 즉 한국현대시는 미래지향적으로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미래가 훤히 열리는 단계라고 보아진다.
우리시의 역사가 비록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은 것이다. 약 100년을 미달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이 기간 동안에 많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해방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단의 많은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작품 몰두에 정진하는이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대단히 발전 가능성이 있는 희망적 단계에 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최근에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한 인터넷 문학의 성행으로 가일층 문학의 패턴이 고조되고 있다. 다방면으로 폭넓은 문학사조가 확장되어지고 있는 터이다.
각 신문사 방송국 문화단체에서 문학강좌가 성행되어지고 있으며, 각급 학교에서도 문예교육이 번창하고 있다. 이런 조류는 21세기 최고의 인간생활의 향기를 드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를 테면 인간 정서의 함양에 좋은 터잡이가 될 것이라는 견해와 징조인 것이다.
이른바 문예대중화 물결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개화와 열기가 넘쳐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요즘의 시들은 대개가 구송(口誦)시의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이런 추세는 곧바로 시낭송 모임을 만들 계기로 이전되었다. 요즘 각기 동아리를 만들어 시낭송의 붐을 이루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보여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한가지 경계해야 할 부분은 시를 취미영역 정도로 하려는 층들이 많다. 전문문학으로서의 단계가 아쉬운 터이다.
문학의 심오한 작용을 통해서 우리의 시대적 갈망과 고통을 해소하는 문학적 사명이 절실한 바로서, 문학이 단순한 취미영역 정도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문학은 인간을 깨우치고 정서감정을 혁신하는데도 중요하거니와 시대변화를 앞질러 나아가는 선두 깃발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아래, 참다운 시인이란 혼불을 지펴 인간의 본질적 사고와 희망을 깨우쳐주는 역할 자가 되어야 한다.
시의 난해성을 탈피하고 시로서의 정위치에 자리잡을 수 있는 척후병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시를 쓰려는가?


3. 시는 무엇 때문에 쓰는가?

시를 난해하다고들 하지만 그 시의 난해성을 파괴하고 깊숙히 파들어가서 보면 실제는 난해 한 것이 아니다. 시를 쓰는 작자가 난해를 극복 하느냐 가 문제 일 것이다.
여기에 시인의 과제는 놓여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시를 전달하는 언어는 일상 언어에 비하여 대단히 불완전하고 난해하다. 언어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고착된 존재가 아니고 유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생성소멸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다. 생성하면서 발전도 하고 때로는 후퇴하면서 사멸(死滅)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쓰는 상용어를 시로서 모두 장식된다면 시어의 의미는 아주 협소한 위치에 서게 되고 말 것이다.
시어의 존재는 무한가변성이어야 함이지, 좁은 한계에 부닥치는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시대나 위치에 따라서 가변적일 수가 있는 것이다. 말이란 자체가 놓여진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기에, 그 말이 설혹 정확하다고 치더라도 어떤 실재상태 보다는 불완전 할 수가 있음으로서 "왜 시를 쓰는가,"의 문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가시성, 그것을 사실 이상의 내면에서 가령 꽃의 표정, 나무의 의식, 실로 나무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서 추구해 내는 의지, 즉 상상력에 의한 메타포어를 통하여 관조세계를 읽고 걸러내어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언어임이 시의식의 언어인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특수한 세계에 도달하는 감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가사의한 경우, 천연현상에 대하여 은빌한 상상력, 말보다는 사실에 접근하고자 하는 현상, 사실 보다는 진실에 도달하려는 의식세계를 동경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시의 필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정신의 상태를 <발레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낙조(落照), 월영(月影), 숲(森林), 바다 같은 수 많은 풍경과 환경들은 인간을 감동시키고, 사랑의 고뇌, 죽음의 환기 등도 마음의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간. 직접의 원인 된다. 이러한 감동은 일반적 감동과 다른 차원에서 엄연히 구별된다..>라 하였고, 그는 이런 반향은 어데서 오느냐 하면 우주적 감각이라는 것과 결합된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시에서는 우주적 감각을 관계하여 음악적 소통에 의한 공명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보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시적 감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시적 감흥이라고 한다면 이는 꿈의 상태와 같은 것이되 실제의 꿈은 아니고 우연한 착상, 동기적 영감, 불규칙하고 비항구적이며, 비의지적인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시적 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적 욕구는 하나는 무목적(無目的), 사회적표현(社會的表現)으로 대별 할 수가 있다.
전자는 생명근원적 가치의 영원과 순수성에 지향함이고, 후자는 역사의식이라고 할 것이다.
인간의 삶의 진실을 반영하는 시대적 정신이야말로 시정신의 형성본질이 되는 것이다.
어찌튼 시를 쓰는 이유는 각기 다를 것이다. 의향되는 대로 자기 취향에 맞는 방향을 설정 할 것이고, 목표도 다를 것이며, 생각의 지향하는 바가 각기 다른 만큼 개성에 따라 천차만별 할 것이나, 시로서 말하고자 하는 표현세계, 즉 그 자신의 내면세계의 의식이라는 존재는 결국 시에 대하 애착이 있기 때문에 시를 쓰게 된다는 결론이며, 이것이야 말로 인간 영혼의 본질적인 정념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포엠스퀘어 [문학광장]
글쓴이 : 雲岩/韓秉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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