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를 쓴다는 가치와 존재의미 시를 쓴다는 것은 직업적인 것과는 무관한 관계이다. 옛 공자는 공리주의적인 가치를 띄우고 시를 쓴다고 했다. 그러나 현대인이 시를 써서 치부를 노리는 일이 될수 있을까? 시를 써서 명예를 얻고 귀족 냄새를 풍기며 살 수 있는 것일까? 어떤 통속적인 목적달성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를 쓴다고 한다면 그것은 절대 잘 못 선택한 직업이리라. 하기야 요즘 세상에는 시인이 되려고 돈을 들여서 억지 등단을 한다. 이런 경우야말로 공리주의적 까닭이라고 볼 것이다. 시인이 되어서 사회적 명성을 얻고자 하는 류도 역시 공리주의적 속성이다. 그런 시인이 과연 시다운 시를 쓸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그저 시같은 시인같은 흉내는 낼 수 있을 것이로되 진정코 시다운 감동에 의하여 발현된 작품을 써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진정으로 문단을 아끼려는 생각에 마음 착잡하기만 하다. 시를 썻기 때문에 출세를 했고, 남보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생활을 한다라든지 하는 따위는 시적 행위에서 얻어진 결과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시인이 되었으니 생전에 자기 시비(詩碑)를 세운다라든지, 하는 것도 역시 공리주의적 타습을 벗어날 수 없다. 자연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울 대답은 없을 것이다. 바보같은 질문이요. 대답일 것이다. 사는 일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바는 그 자체로서 틀리는 말이 아니다. 시를 쓰는 것이 살 맛이 난다고 하는 것과도 맥락이 일치 한다. 시를 쓰면 마음의 향기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시를 쓰게 되는 원인이요. 결과일 것이요. 애너지이일 것이다. 이에 관하여 <C.D루이스>는 시의 효용론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가령 음악을 감상하였을 때 아름다운 감흥을 일으켰다고 한다면, 그 음악은 그 사람에게 정신적 기여를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음악의 횽요가치 일 것이다. 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상(無償)의 행복가치가 시였다라고 한다면 시의 효용은 설명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햇빛에 자양이 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속에 정신적 자양이 들어 있는 것이라면 효용가치란 소중한 것이 아닐련가, 시를 쓰는 작업이란 일종의 쾌락현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사상이 머리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이 아닌가,. 1. 시를 쓴다는 것이 기쁘고 행복하다. 2. 시를 쓴다는 것이 심신에 안정을 유발한다. 3. 세상을 정온(定溫)케 하는 향기가 있다.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기 주장과 효용론에 관한 주장이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서 <TS엘리어트>는 시의 효용비평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시가 띄는 의미로서 주요한 효용은 독자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동안 독자측의 어떤 습성을 만족시킬 것, 독자의 정신상태를 만족시키고 안정케하며….>-중략-/<시는 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논리성을 무시하거나 제거함으로써 그 효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시의 효용은 언어의 효용이다.>-중략-/<시는 새로운 언어의 생명을 재창조하는 효용율을 가지고 있다.>-중략-/그러기에 시는 신선한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칭한 까닭이요. 언어의 연금술 사라고 까지 그는 강조하지 않았던가, 엘리어트는 시인을 언어의 주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김기림(金起林)의 <詩의 理解>/스티븐 펜더의 <급행열차>/괴테의 <나그네의 밤>/노자영(盧子泳)의 <내 혼이 불탈 때>를 예로 들어 그 효용의 가치를 다음에 설명하고자 한다. 시의 효용론을 들추자면 수 많은 이론이 나올 수가 있고, 이것을 정리하자면 각자의 의견이 분분할 것이라고 보아진다. 어차피 효용성을 짚어보고자 하는 바임에 몇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자한다. 앞에서도 언급을 했거니와 효용성은 개인의 심리와 사회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극과 극이 다르듯이, 음과 양이 다르고, 막대의 방향이 다른 것이 듯, 보는 시각차에 따라서,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보여지는 각도가 달라진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것을 상반적 질의 방향이라고 하자, 하나는 현실성을 결과 코자 하는데 반하여 하나는 현실성을 거부하는 내용으로 보여진다면 그 하나는 보는 입장의 현실성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보는 견해이다. 하나는 환경을 가공하여 생활을 개선해 나가며 질을 높여간다. 이를 생활예술이라고 한다. 하나는 생활을 등지고자하는 태도로 도피적 사고를 가진 예술성이다. 다분히 부정적 가치와 시대성을 달리하는시각, 또한 동시대에도 각기 다른 질적 각도를 달리하려는 예술로서의 표식( 標識)이 존재함에는 엄연한 평가로는 대조적이기도 하다. 김기림(金起林)의 시의 대조(對照)애서 보면 이러하다. <힘차고 뚜렷한 첫 선언 "피스톤'의 캄캄한 진술(陳述) 뒤 더 서두르지도 않고 여왕처럼 미그러져 급행열차는 역을 떠난다.. 머리도 수그리지 않고 모르는 척 늠름하게 그는 초라스레 밖에 다가붙은 집들과 "가스"공장과 드디어 묘지의 비석으로 인쇄된 음침한 죽음의 정글을 지나간다. 거리 저편에 망망한 시골이 펴져 있다. 거기서 속력을 내며 그는 신비를 대해에 뜬 배들의 눈부시는 무게를 갖춘다. 그가 노래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다. 처음에는 아주 낮게 다음에는 높게 드디어 째즈처럼 미쳐서 구비마다 소리치는 기적의 노래/이하 생략. -스티븐 스펜더의 "급행열차(Express)-" 나귀 얼굴이 별들의 나귀 젖을 마셨다. 젖빛 타래줄이 하늘 사랑방과 금빛 창살로부터 꺼지면서 "콜롬바인"을 주려 장옷을 이루었다. 바다의 나귀를 발꿈치에 채어 물줄기마다 멋대로 소리치며 신묘한 모래에 쏴 내리면---- 그리고 물개들은 수염 여윈 나무 밑마다 "바벨의 탑을 쌓노라 지껄인다. 지금 드리는 것은 카인과 아벨이 또 사우는 겔까,/이하생략. -아이더스 시트웰 "나귀의 얼굴(Ass Face)" 위의 시 두편을 독자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진솔하게 받아드려 본다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작용이 다를 것이다. 스펜더의 시에서는 힘의 역학적 감정, 서두름 없이 힘차게 역동하는 급행열차, 여왕의 이미지와 연결되고 그러다가 다시 위기감 , 무덤앞의 비석, 바다와 육박하는 전율과 시각과 청각의 조화 풍경과 기계의 리듬 등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아래의 시에서는 파도의 거센 율동, 물개들의 바벨탑을 쌓기같은 연동성, 그에 대한 시적 흐름이 리드미컬하다. 두 시인의 문명에 대한 인식 그것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이질적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애는 필자의 견해에 의한 <괴테와 노자영>의 시를 통한 시의 횽용성을 제기해 보는 각도이다. 산에 산 그 하늘 가라앉고 나무끝에 바람의 하늘거림도 안보이고 새소리 숲속에 잠기는 아아, 이윽고 이제 너도 쉬게 되리니/全篇. -괴테 "나그네" -이 시가 주는 언덕에 대하 정감 실제 그는 키케르하인 언덕에서 이 시를 읇었다. 이 시에서 나오는 나그네는 자기 자신이다. 고요가 극에 이르는 순간 대자연에 대한 영원의 휴식을 추구하는 영혼, 그 시적 세계가 의미심장하다. 상징적으로 부르고 있는 체험시,(쉬게 되리라는 죽음에 대하 예감성) 괴테는 만년에 이 시를 통하여 깊은 감회와 추억에 몰두했다. 괴테가 키케로의 오두막집에서 썼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던 것을 옮겨 놓았다고 한다. 시인은 시의 가치와 효용성을 무시 할 수 없다. 비록 벽에 써 놓은 글일지라도 이 글의 의미심장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효용성을 깊이있게 관조해 보고파 한 것이다. 슬피 울든, 가을의 노래! 낙엽 속에나, 누워있는지? 서리찬 들 위에는, 갈대가 울고 일어오는 달밤 위에는 누구를 부르는, 저 기러기 소리! 저 달이 만일 거울이라면 내가 울고 온 우리 고향의 그리운 그 땅도 비춰주련만…/全篇 -노자영 (盧子泳)"망향)" 이 시인은 본래 소설과 수필과 시를 쓴 분이다. <매일신보>에 "월하(月下 )의 꿈"을 2등 당선하여 출발 한 시인이다. 황해도 장연이 고향인데 그의 시에서 맛 볼 수 있는 점은 "망향"의 의미를 통하여 나그네의 애환을 담은 듯 한 작품이다.. "나그네"의 의미가 서로 다른 듯 한 문체이지만 자연정서에 상통부합한다는 점이다. 침묵하는 세계의 관조, 죽음으로 돌아갈 숲속, 그리고 그 실상의 그늘에 대한 잠재의식의 내면을 보여주는 괴테의 심성에서나, 달을 거울 삼아 부르는 망향사(望鄕辭)를 부른 노자영 두 사람 모두 인생귀환의 꿈을 다른 시각에서 보고 노래를 한 것이다. 시는 결론적으로 외부에 나타나는 실체적인 면과 시인 각자의 자기 내면성찰의 함축적인 소지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시는 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아리송한 영혼의 삼입음(揷入音)으로 언제나 가공되지 않은 향유같은 향취가 있다. 철자법이나 어법이나 언어학상의 원칙주의가 아니라. 언어의 해탈과정에서 얻어진 신소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를 통하여 인간심정의 참모습을 볼 수 있고, 현실의 암담과 비통함과 돌발적인 현상들과 절말감과 악에 대항하는 선의 힘을 원천으로 발휘 한다. |
출처 : 포엠스퀘어 [문학광장]
글쓴이 : 雲岩/韓秉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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