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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방/유명시

눈길/고은

by 미스커피 2012. 1. 4.

눈길

희망의 문학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출처 : 네이버 / 희망의 문학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귀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를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희망의 문학 요점 정리

희망의 문학 지은이 : 고은

희망의 문학 갈래 : 자유시. 서정시

희망의 문학 시대 : 1960년대

희망의 문학 율격 : 내재율

희망의 문학 성격 : 명상적(冥想的). 관념적(觀念的). 상징적(象徵的). 관조적(觀照的)

희망의 문학 어조 : 엄숙하고 명상적이며 묵직한 어조

희망의 문학 구성 :

1-4행 방황 끝의 명상

5-9행 공(空)으로 정화된 세계의 발견

10-15행 새로운 정신 세계의 열림

16-21행 정화된 외부 세계의 내면화

희망의 문학 제재 : 눈 내리는 풍경

희망의 문학 주제 : 무념 무상(無念無想)의 경지, 오랜 방황의 시기를 지내고 얻은 마음의 평화, 무념 무상(無念無想)의 도(道). 눈길을 바라보고 무념(無念)에 잠긴 묵상(默想). 모든 고뇌와 방황을 씻고 무욕(無慾)의 상태에서 모든 것을 다시 인식하고자 함

희망의 문학 특징 : 종결형 어미 '∼노라'가 반복 사용되고, 차분하고 명상적인 관조적 어조를 보이면서도 감격스러운 감정이 나타나고 있음

희망의 문학 출전 : <피안감성>(1962)

 

 


희망의 문학 내용 연구

이제 바라보노라.(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고, 명상이고, 관조임을 말한다. / 종결형 어미 '∼노라'가 반복 사용되고, 차분하고 명상적인 관조적 어조를 보이면서도 감격스러운 감정이 나타나고 있음 )

지난 것(젊은 시절 또는 지나간 시절로 고통과 쾌락, 야망과 좌절, 사랑과 미움을 말하고 있다.) 이 다 덮여 있는 눈길(여기서 눈길(雪路)은 눈으로 만들어진 길로 눈은 그 흰 빛깔로 인해 정화(淨化)의 이미지를,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는 의미에서 관용 또는 포용의 이미지를 가진다.)

온 겨울을 떠돌고 와(오랜 동안 떠돈 비정한 현실 세계 혹은 긴 시간 속의 방황과 고통으로 '지난 것'과 같은 의미)

여기 있는 낯선 지역('다 덮여 있는 눈길'과 같은 의미로 방황하던 시절의 눈과는 방황의 끝이 끝난 명상과 관조와 성찰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낯설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을 바라보노라.(관조적, 성찰적, 명상적)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방황이 끝난 다음에 솟아오르는 벅찬 감격을 정화의 이미지. 관용과 포용의 이미지인 눈이 덮인 세상을 표현)

세상은 지금 묵념[명상]의 가장자리('가장자리'는 둘레나 끝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깨달음의 전단계라고 볼 수 있고, 묵념에는 간절한 염원과 소망이 깔려 있다.)

지나 온 어느 나라('지난 것', '온 겨울을 떠돌고 와'와 같은 의미로 삶의 괴로움과 번뇌, 과거의 고통과 방황 등)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눈 덮인 풍경의 고요함과 백설과 같은 평화로움을 말함)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역설적인 표현으로 森羅萬象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을 말함)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求道的 물음으로 불교적 색채가 강함)

내리는 눈 사이로(새로운 정신세계)

귀 기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그 동안의 방황과 번민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 비워 놓은 나의 의식 세계로 자연스럽게 들려 옴 / 새롭게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 눈을 보면서 집착을 버리고 정화된 나는 드디어 세계를 새로 인식할 수 있게 됨,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귀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는 바로 참된 귀)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현실의 방황을 끝내고 새로운 깨달음이 시작되는 눈길, 명상에 잠기게 된 직접적 계기)

안에서는 어둠이노라(내면의 갈등과 고뇌가 사라져 버린 상태 → 세상의 어떠한 빛도 아직 침범하지 못한 원시의 어둠 / 번민과 고뇌가 정화된 인식의 경지)[외면과 내면의 동일화]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삶의 괴로움으로 인간의 백팔번뇌를 의미한다. 백팔번뇌는 사람이 지닌 108가지의 번뇌. 6근(根)에 각기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이 있어 18가지가 되고, 이에 탐(貪)과 무탐(無貪)이 있어 36가지가 되며, 이것을 다시 과거, 현재, 미래로 각각 풀면 108가지가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엄청난 번뇌를 이른다.)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시적 화자의 염원과 소망이 깔려 있는 적막의 상태 - 무념 무상의 경지 혹은 평화로운 마음 상태)

쌓이는 눈더미 앞에(지난온 삶의 성찰과 명상과 관조, 깨달음의 심화)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어둠은 무욕(無慾)의 상태로 번민과 고뇌에서 벗어난 무념 무상의 절대적 경지로 어둠이라는 시각적 표현으로 상징화함)

 

 


희망의 문학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작가가 역사(歷史)와 민족(民族)의 문제로 시야를 확대하기 이전에 창작한 작품으로 허무주의적인 시적 경향을 띠던 등단 초기의 작품이지만, 작품 속에는 이미 허무주의적인 시적 경향을 넘어서려는 내면적 지향이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된다.

눈은 시인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시적 이미지가 대조적이다. 그래서 흔히들 시에서 사용되는 '눈'의 시어는 고통과 시련과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여기서의 눈(雪)은 그 흰 빛깔로 인해 정화(淨化)의 이미지를,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는 의미에서 관용 또는 포용의 이미지를 가진다. 이 작품의 눈 역시 이러한 이미지를 보여 준다.

이 시에서 눈길은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즉 지난날의 고통과 고뇌를 정화시켜 포근히 감싸안는 평온한 상태의 표현이다. 그러한 상태는 시인이 '온 겨울을 떠돌고'에서와 같은 오랜 방황과 번민(煩悶)의 구도(求道) 생활 끝에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벅찬 감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경지이다. 이 경지를 작자는 '설레이는 평화'라고 표현했다. 그러한 경지에서 그는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보이고 '대지의 고백'이 들리는 듯한 새로운 정신 세계가 열리는 것을 체험한다.

이렇게 그 동안의 번민과 방황에서 벗어난 명상의 정신 상태를 작자는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는 구절에 압축했다. 여기서의 '어둠'은 절망적인 암흑이 아니라 모든 욕심, 후회, 애증(愛憎) 따위를 지워 버린 무념 무상(無念無想)의 경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곧 '위대한 적막(寂寞)'이며,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인 것이다.


 

희망의 문학 심화 자료

희망의 문학 고은 [ 高銀 ] (1933 - )

본명 고은태(高銀泰). 전북 군산 출생. 군산중학교 4학년까지가 공식적인 학력이다. 1952년 20세의 나이로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법명은 일초(一超)로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를 써왔다. 조지훈 등의 천거로 1958년 《현대시》에 《폐결핵》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간행하였고, 1962년 환속하여 시인으로, 어두운 독재시대에 맞서는 재야운동가로서의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다. 1974년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를 출판하며 시인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였다. 무

그 해부터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 참여하며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앞장서 왔다. 1983년 이상화(李相華)와 결혼하였고 20여 년간 지은 시들을 정리하여 《고은 시 전집》1.2권을 민음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세계의 문학》에 《만인보(萬人譜)》연재를 시작, 그 해 창작과 비평사에서 《만인보》 1.2.3권을 간행한 이후, 1988년에 4.5.6권, 1990년에 7.8.9권을 간행하여, 다음해 《만인보》로 중앙문화대상을 받았다. 1993년 《백두산》 연작을 완성하였고, 1999년 《머나먼 길》을 출판하였다.

《피안감성》에서 《신언어의 마을》(1967)에 이르는 초기시는 주로 허무와 무상을 탐미적으로 노래한 반면, 《문의 마을에 가서》를 발표한 이후부터는 어두운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현실에 대한 치열한 참여의식과 역사의식으로 시 세계가 바뀌어갔다. 게다가 1980년 5월 이후부터 시작된 투옥, 고문, 연금은 그의 시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역사와 현실 참여를 노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웅주의에 물들지 않고 진솔한 삶의 내면을 드러내 그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이루었다. 연작시 《만인보》로 시적 형상성을 얻은 뒤 장편서사시 《백두산》을 통해 더욱 빛을 발하였다.

희망의 문학 묘향산

아름다움이란 소멸이다

그 요염한 순간

세상의 이름들이 없어졌다

아무개였다

아무개였다

하얗게 번개쳐

 

내려와서 돌아다보았다

아무개였다

세상의 기억 없어졌다

 

가까스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청천강!

청천강 본줄기로 내려가는

비로암!

비로암 아래 다급한 물소리

치매였다

이름 둘이었다 하나가 아니라

 

청천강이 먼저였고

거꾸로 아스라이 비로암이 나중이었다

희망의 문학 고은 '불교문학상' 수상 소감   

 어디 이백 두보가 상 받고 시를 지었겠습니까. 어디 단테밀턴이 상 받았습니까. 상은 커녕 시대의 탄압을 받았음에도 그 시는 더욱 찬연한 바 있었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문학이 상의 대상이 됨으로써 상 받은 문학과 상 받지 못한 문학으로 문학을 규정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마저 보여온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상 하나 받은 적 없이 겨레의 자아를 지켜야 했던 만해가 오늘따라 떠오르지 않는바 아닙니다. 불교를 받아들인 1600년 이래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문화적 유전인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시문학은 곧 불교문학 자체로 해명되어 마땅했습니다. 이런 사연이 내 문학에 반영된 것인지 이번에 이 집안 뒤란이듯 남의 눈에 잘 띠지 않는데서 이 상을 받게 되니 조금은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충정으로 베푸는 뜻이거니 하고 받게 되나 앞으로 내 시와 문학의 길이 과연 충정에 보답이 될지 저으기 걱정입니다. 내설악 오세암 쯤에 들어가서 그곳에 잠시 숨을 들이쉬고 내 숨을 푹 내쉬고 싶습니다.

희망의 문학 불교문학상 선정 심사평

 민중적 삶의 시와 불교적 화두  - 고은 시세계 -

 한국시문학사상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의 한 사람인 고은의 시 세계는 그 양적 방대함과 더불어 그 극적 자기 혁신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하나의 산맥이 되었다.

 1958년 등단 이후 그는 시집《피안감성》《해변의 운문》을 내던 1960년대 초반까지는 자연물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삶의 원리를 밝히는 초월주의적 서정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강물, 바람, 그림자 등 움직임은 있으되 실체는 규명하기 어려운 자연물의 이미지를 빌어 원대한 우주를 생성하면서 그 순환의 체계 안으로 삶의 실체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묘사했다. 그러나 죽음의 자리에서 껴안게 되는 그의 허무주의에는 상실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연민과 집착이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서 숙명을 떨쳐내려는 의지적 측면을 함께 머금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1970년대 들어서서 고은은 초월적이고 허무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의 역사적 현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민중적 시인으로서 변모를 일신한다. 참된 시는 고통받는 민중적 향유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서, 그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밝은 미래를 위해 역사의 현장에 온몸을 던질 것을 노래한다. 소승적 차원에서 대승적 차원의 시적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신은 한국시사의 새로운 주류로 그가 떠오르고 있음을 예고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되어 아직도 쓰여지고 있는 대하시 《만인보》에 이르러 그의 시는 이땅의 중생들이 펼치고 있는 삶을 넓고 깊게 그려내기 시작함으로서 그의 문학적 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에 현대불교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된 《묘향산》은 그의 시적 화두가 아직도 아름다운 것의 소멸과 천지자연의 창조라는 근원적 질문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 작품으로서의 이러한 선적 화두가 그의 시적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그 문학적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한 순간에 번개처럼 세상의 이름은 없어지고 아름다움도 소멸하지만 다시 도도하게 흐르는 청천강의 인식이야말로 언제나 그의 시적 통찰을 새롭게 하면서 중단 없이 계속되는 자기 확충과 심화의 세계로 이끌어나가는 탈속의 촉매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심사위원 : 김정휴·이청화·문혜관·박수완·문창길·나태주·이홍섭·송수권·김재홍 · 최동호(글)](출처 : 불교문학)

희망의 문학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불교경전 ≪반야심경≫의 명구(名句). 물질적인 세계와 평등 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함. 원문은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며,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된다.

그리고 범어(梵語)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되어 있다.

이 긴 문장을 한역(漢譯)할 때 열여섯 글자로 간략히 요약한 것이다. 따라서,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래 불교에서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이와 같이 평등한 불이(不二)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전개시켰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색과 공을 차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일의(一義)로 관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명구 또한 가유(假有)의 존재인 색 속에서 실상을 발견하는 원리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색과 공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여 색이 변괴(變壞)되어서 공을 이루는 현상적인 고찰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당체(當體)를 직관하여 곧 공임을 볼 때, 완전한 해탈을 얻은 자유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방법이다.

이 구절에 대한 고승들의 해석은 많지만, 가장 명쾌하고 독창적으로 해설한 이는 신라의 원측(圓測)이다. 원측은 그의 ≪반야바라밀다심경찬 般若波羅蜜多心經贊≫에서 유식삼성(唯識三性)의 교리에 입각하여 이 구절을 해석하였다.

원측은 색즉시공에 대하여, “변계소집(遍計所執)은 본래 없는 것이므로 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인연 따라 일어나는 까닭에 공이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생겨나지 않는 것이므로 마치 공화(空華)와 같고 그 자체가 또한 공한 것이다.”하였다.

다시 말하면, 변계소집에 의하여 일어난 색은 본래 없는 것을 망념으로 그려낸 것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이고, 의타기성에 의하여 생겨난 색은 인연 따라 존재하고 멸하는 가유(假有)의 색이기 때문에 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원성실성의 입장에서 보면 색이란 일어남도 일어나지 않음도 없는 공의 본질이기 때문에 역시 공하다는 뜻이다.

원측은 계속하여 색과 공이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를 밝히면서, 만약 하나라고 하면 일집(一執)에 빠지게 되고 다르다고 하면 이집(異執)에 빠지게 되며, 하나이면서 다른 것이라고 하면 서로 위배되는 것이 되고,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하면 희론(癰論)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명구의 가르침은 색이나 공에 대한 분별과 집착을 떠나 곧바로 그 실체를 꿰뚫어보라는 데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般若波羅蜜多心經贊(圓測), 般若心經(李箕永 譯解, 韓國佛敎硏究院, 197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희망의 문학 공(空) 사상

불교의 근본교리 중 하나로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상.

〔연 원〕

우리 나라 불교의 모든 종파는 공사상을 크게 존숭하고 연구하였다. 산스크리트어로는 순야(Sunya)이며, 불교 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어 온 말로서, 공허 또는 허무를 의미한다.

인도의 수학에서는 영(零)으로 사용되었고, 힌두교에서는 브라만(梵)과 니르바나(涅槃)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 의미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이법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불교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내 용〕

일반적으로 공사상은 반야부(般若部) 계통의 대승불교사상으로 생각되어 왔으나, 그 근원은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진리인 연기(緣起)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현상계를 유전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멸하는 존재이며, 고정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인 것이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이며, 이것이 부처가 깨달은 내용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서 법체(法體)는 항유(恒有)하다는 실제론을 주창하였으므로, 초기 대승불교에서는 법의 항유를 부정하면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공설(二空說)을 내세운다. 아공은 자아를 실재라고 인정하는 미혹한 집착을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법공은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하여 항상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잘못된 집착을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공설 외에도 불교의 경전 속에는 공에 대한 다양한 분류가 전개된다. 이와 같은 공의 분류는 그 성질의 분류라기보다는 듣는 사람의 이해능력에 따라 설법하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의 결과이다. 공의 사상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현정(破邪顯正:邪見·邪道를 파괴하여 정법을 널리 알려 나타냄)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친다.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가지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대품반야경 大品般若經≫에서 설한 18공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다. 우선, 사물을 감각하고 지각하는 인간의 육근(六根)이 공하며〔內空〕, 다음으로는 육근의 대상이 되는 육경(六境)이 공하며〔外空〕,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마침내는 그 공도 또한 공임〔空空〕을 설한다.

이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하여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버리는 공병(空病)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설이다. 더 나아가서 부정하는 실체로서의 공조차도 부정하는데, 이는 또 다른 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설은 대립적인 상대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다.

공은 가설적인 이름을 붙여 공이라고 한 것일 따름이며, 공 자체는 진리가 아니다. 즉, 공은 진리를 밝히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 무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특히, ≪반야심경≫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서 이루어져 있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바의 사물을 떠나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디까지나 자아적인 분열에 휘말리거나 집착해서는 안 될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엄숙하게 타이른다는 의미에서 공의 실천은 한층 더 강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신라의 원효(元曉)는 ≪기신론소 起信論疏≫에서 공이라는 진실을 모든 사람에게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본래 내 몸에 갖추어져 있는 그 진실을 자각하는 자가 부처이기 때문에, 이 공사상에 입각하여 승려·속인·남자·여자 등의 모두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과 그 근본으로서 공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진실이 본래 어떠한 인간에게도, 심지어는 만물에까지 갖추어져 있다는 사고방식은 대승불교의 발전과 함께 후대에 이르러 실유불성(悉有佛性:모든 존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지님)이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공사상은 공(空)·가(假)·중(中)이라는 삼제(三諦)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는데, 우리 나라의 승랑(僧朗) 등은 이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이 공관에 입각해서 보면 거짓〔假〕된 모습을 하고 있는 상대적인 것이며, 그 밑바닥의 진리의 세계에서 볼 때는 한결같은 공의 세계로서 유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가의 세계에서는 현상이 공함을 파악하고 공의 세계로 몰입한 뒤 다시 나올 때, 거기에는 중도(中道)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즉, 모든 상대적인 현상을 공하게 비울 때 그곳에 해탈의 세계가 전개된다는 수행론은 공사상을 토대로 하여 전개시킨 것이다.

≪참고문헌≫ 佛敎學槪論(金東華, 寶蓮閣, 1954), 般若心經(李箕永 譯註, 韓國佛敎硏究院, 1979). 徐景洙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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