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요점 정리
지은이 : 한용운(韓龍雲)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낭만적. 상징적. 의지적, 형이상학적, 명상적, 불교적, 민족적(님을 조국으로 해석할 때)
어조 : 연가풍의 여성적 어조, 영탄적 어조
심상 : 시각적. 후각적. 촉각적. 서술적 심상
구성 :
1-4행 : 임과의 이별(기)
5-6행 : 이별 후의 슬픔(승)
7-8행 : 새 희망에의 의지(전)
9-10행 : 불굴의 의지의 사랑(결)
제재 : 임과의 이별
주제 : 임을 향한 절대적 사랑,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 재회의 신념과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 현실적으로는 부재(不在)하지만 본질적으로 항존(恒存)하는 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 임을 잃은 슬픔과 그 초극(극복)
특징 : 역설적 표현이 있고,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을 구사하고, 불교의 윤회설과 공(空)사상에 바탕을 두고, 경어체와 여성적 어조를 사용하고 산문적 진술을 하고 있음.
출전 : <님의 침묵>(1926)
내용 연구
님[한용운의 시에서는 생명적인 근원, 중생, 조국, 민족, 붙타, 애인, 불도 등 다양한 뜻을 지님]은 갔습니다. 아아[이별의 자각, 슬픔],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미래에 대한 찬란한 희망'의 뜻을 함축. '단풍나무 숲'과 대조됨]을 깨치고['깨뜨리고'의 사투리] 단풍나무 숲[푸른 산빛과 대조적으로 그 희망의 푸른 색이 소멸된 '절망, 조락(凋落)'의 뜻을 함축. 불교의 '공(空)' 사상과 연결됨]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 작은 길을 걸어서 : 임이 가 버림으로 해서 푸른 자연의 빛은 사라지고 조락과 슬픔이 깔린 자연이 펼쳐져 있음을 나타낸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는 시각적 이미지의 강렬함을 나타내며, 시구 전체는 강한 리듬에서 약한 리듬으로의 극적 변화를 유발한다.]
황금(黃金)의 꽃[황금은 보통 고귀하고 변치 않는 존재로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찬란한 사랑의 약속'이란 뜻. '차디찬 티끌'과 대조됨]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맹서가 식어 보람이 없어진 것을 의미함.]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 3중 비유 구조로써 존재와 부재(不在) 사이의 대립을 표현하고 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임과 만난 순간의 황홀감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님'이 조국이라면 '첫 키스'는 조국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며, 절대자라면 절대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함축한다.]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 나는 임의 진리의 말이 너무나 커서 귀가 막힐 지경이며, 임의 얼굴이 너무 아름답고 눈부셔서 눈이 멀 지경입니다. 이 부분은 역설적 표현으로 이 표현들은 표면적 차원에서 의미의 모순을 이루면서, 심층의 보다 깊은 의미를 나타내 준다. 즉 '님의 말소리'와 '님의 얼굴'이 나를 귀먹고 눈멀게 했다는 것은 화자에게 '님'이 그만큼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뜻이다.]
사랑도 사람의 일[세속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회자정리(會者定離 :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불교 교리)]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시상의 전환이 시작되는 첫 어절 /슬픔을 희망으로 전이시킴)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이 부분은 이별의 슬픔을 희망으로 전이시키면서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행으로 희망의 정수박이('정수리'의 경상 방언, 머리 위에 숨구멍이 있는 자리)는 재회에 대한 희망을 의미]에 들어부었습니다.[걷잡을 수 없는 -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임과 이별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슬픔으로 끝나게 하지 않고, 그 슬픔의 힘을 새로운 희망으로 전환시켜 새 출발의 힘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 만날 것을 믿습니다. : 임과의 재회를 확신하고 있는 부분으로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한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反)'의 의미를 갖고, 불교적 깨달음이 나타나 있다.]
아아[깨달음의 기쁨],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역설적 표현으로 떠난 '님'을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라면, 헤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즉, '님'은 여전히 화자의 곁에 있다는 것이다. '님'이 조국을 의미한다면, 이 표현은 국권을 찾기 위한 독립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내 마음은 결코 조국을 잃지 않았다는 말을 뜻한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북받쳐 오르는 사랑]는 님의 침묵(沈默)[임의 본질적 존재로 임의 모습이 은폐되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음을 뜻한다. 보이지 않는 본질 혹은 쉽지 않은 깨달음의 길을 의미한다. 단, 임은 완전히 간 것이 아니라 단지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는 시인의 의지적 현실 인식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암담한 조국의 현실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을 휩싸고 돕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 휩싸고 돕니다. : 다시 말해서 '님의 침묵'이라는 표현은 '님'이 지금 곁에 있지만 아무 말을 하고 있지 않아서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뜻이다. 화자는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는 '님'을 향한 '사랑의 노래'를 감격에 차서 부르고 있다. '님'이 조국을 의미한다면, 이 '사랑의 노래'는 조국 독립을 위한 헌신을 뜻하게 된다. 그러나 그 님이 절대자로 본다면 유한자(有限者)인 자아가 감히 도달할 수 없는 '님'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는 구도의 자세를 노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님'의 세계 밖에서나마 승화된 갈망이 사랑의 노래를 넘쳐 흐르게 된다. / 헤어짐은 새로운 만남의 전제 조건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닫는 순간, 떠났다고 생각했던 '님'은 사실은 떠난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임을 알게 되고, 그 침묵하고 있는 임을 위해 사랑의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1) 작품 선정의 취지
이 작품은 시어의 함축적 의미와 표현 방법을 학습하도록 구성되었다. 이 작품의 언어 표출방식은 일상어의 표출 방식과 매우 다르다. 그것은 운율과 이미지를 이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함축적 시어와 여러 표현 방법을 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작품에 사용된 언어는 일상어에서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매우 다르다. 그러한 일상어와의 차이점은 시어의 함축성으로부터 연유한 것이므로, 이 작품의 함축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시어의 함축성을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또한 시어가 함축성을 갖게 하기 위해 이 작품은 독특한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표현법과 시어의 함축성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적절하다.
(2) 지도의 핵심
'님의 침묵'에는 시대 상황과 시인의 사상적 배경이 함축적 시어 속에 담겨 있으며, 시인이 자주 사용하는 역설법을 통해 시적 진실을 담고자 했다. 따라서 시어의 함축적 의미와 역설법에 특히 유의하여 지도하도록 한다.
(3) 작품 연구
이 시는 불교적인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이루어진 서정시로서, 그 사상적 깊이와 예술적 차원의 높이로 한용운을 한국 현대시사상 가장 빛나는 시인의 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시인이 주로 구사하는 경어체를 이용하여 시상을 부드럽게 만들면서도 절실한 심정을 적절히 표현하였고, 순수한 우리말을 적절히 선택하여 유려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별의 슬픔'과 그를 극복하고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자기 극복의 자세가 돋보인다. 이는 종교로써 단련된 시인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면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저항적 의지와 밝은 미래의 대한 신념까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님의 침묵'은 '님'이 누구냐로 많은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독립 정신으로 일관한 그의 생애에 비추어 그것은 잃어버린 '조국'이라고 보아야 적합할 것이다. 그러한 추측의 타당성은 이 시의 마지막 부분, 즉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님은 갔다'고 객관적인 현실을 긍정하면서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여 주관적인 의지로서 '님은 자기와 함께 있음'을 강조하고 그 '님'을 붙들고 사랑의 노래를 읊는 시인의 애국심을 거듭 확인하고 있다.
하지만 '님'을 반드시 시대 상황과만 연결시킬 수는 없다. 그가 불자(佛子)였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님'은 '부처'일수도 있으며, 좀더 넓혀서 보편적으로 해석해 보면 '절대자'로 볼 수도 있다. 이런 다양성은 이 시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친해지기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시 속의 상황을 파악하여 시적 화자, 즉 서정적 자아의 입장과 심정을 추리해 보게 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이 시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작품과 관련된 배경 지식을 충분히 제시해 주어야 한다. 또한 작품 자체에 시적 상황과 시적 화자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있음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풀이 :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지마는' 등의 시구를 통해 시적 화자는 임과 이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매우 슬프고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하지만 시상이 전개되면서 시적 화자는 그 슬픔을 극복하고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고 있다.
이 시에 나타난 '님'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지 자유롭게 말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시의 함축적 언어를 이해하고 그 의미를 파악해 보는 활동이다. 따라서 교사는 시의 언어는 일상어와는 다른 점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 상징적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표현법과 시인의 삶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함을 주지시켜야 한다.
풀이 : '님'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그 대상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취한다. 물론 이성으로서의 '애인'을 의미하는 것이 보통이자만, 한용운은 승려이며 독립 운동가였다는 점등을 고려해 볼 때, 이 작품에서의 '님'은 '부처, 조국, 민족'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물론 아주 보편화시켜서 '절대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꼼꼼히 읽기
이 시는 '이별 → 이별 후의 슬픔 → 희망으로의 전이(轉移) → 만남'이라는 기, 승, 전, 결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 이러한 시상의 흐름을 통해 볼 때 이 시는 이별의 시가 아니라 만남의 시이며, 절망의 시가 아니라 희망의 시, 기다림의 시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만나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고, 헤어지면 반드시 만남이 있다는 불교의 윤회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1. 이 시에서 이별의 슬픔을 희망으로 전이시키면서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행을 지적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시상의 흐름을 이해하고 시적 감수성을 기르기 위한 활동이다. 시적 상황과 그에 따른 시적 화자의 정서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파악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학생들이 일상 생활에서의 경험을 시적 상황과 연관시켜서 파악한다면 시적 정서의 변화 과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풀이 : 이 시는 '이별[1~4행]→이별 후의 슬픔[5~6행]→희망으로의 전이(轉移)[7~8행]→만남[9~10행]'으로 그 사상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7행에서 '그러나'를 매개로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라고 한 것은 이별의 슬픔이 희망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2. 1에서와 같이 시적 화자의 감정이 바뀌게 된 이유를 설명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시가 단순히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시도 자체의 논리적 흐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교사는 시가 갖고 있는 논리적 전개과정을 명확하게 이해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시 속의 특정한 정서는 그 자체에 적절한 근거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논리적 과정을 거쳐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도록 해 준다.
풀이 : 7행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라는 시구는 슬픔의 무의미함과 슬픔은 영원히 사랑을 잃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부분이다. 더구나 8행의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는 시구는 시적 화자의 감정이 바뀌게 된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다.
탐구 / 역설적 구조
역설은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지만, 그 속에 참뜻(진리)이 숨어 있는 표현 방법이다. 이 작품은 밝음과 어둠, 슬픔과 희망, 헤어짐과 만남은 하나라는 역설적 진리를 담아 내고 있다. 그리하여 '회자 정리(會者定離)'의 체념에 그치지 않고,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는 것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체념이 그저 '단념, 포기, 절망' 같은 소극적인 것으로 끝나 버리지 않고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로 비약하고 있는 것이다. |
* 역설(paradox) : 배리(背理), 역리(易理), 이율 배반(二律背反)
* 역설의 논리학적 정의 : 분명한 진리에 모순되는 진술
* 문학에서의 역설법 : 모순·대립되는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내면적으로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표현법
예)
①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무지개)'→ 생물학적으로 어린이는 아버지가 되 수 없지만, 어떤 정신적 또는 정서적 측면에서는 어린이가 어른에게 가르침을 줄 수도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② '찬란한 슬픔' → '찬란하다'와 '슬픔'은 정서상 대립적이므로 불일치 한다. 그러나 슬픔을 극대화하면서도 슬픔 뒤에 올 어떤 찬란한 상황을 암시하는 의미를 함축하기 위해 역설법을 구사하고 있다.(모란이 피기까지는)
지도 방법 : 용어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이므로 의미의 명확성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용어 자체에 대한 설명은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으므로 풍부한 예를 활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히 표현법은 '반어법'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두 표현법의 차이점을 보여 주면서 지도해야 한다.
3. 5행의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의 의미를 말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이미 익힌 역설법을 확인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란 것이다. 먼저 논리적으로 모순된 내용이 무엇인지를 찾게 하고, 그것이 역설법임을 확인한 뒤, 시인이 그를 통해 어떤 진리(숨은 뜻)를 제시하고자 했는가를 추리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학생들이 의미를 파악하는 일련의 과정을 숙지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며, 학생들이 구체적인 의미를 제시하기 전까지는 교사 역시 동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풀이 : 향기로운 말소리에 귀가 먹고, 꽃다운 얼굴에 눈이 멀 까닭은 없다. 따라서 이는 역설법이 구사되었다. 그렇다면 표면적인 해석은 '님의 말소리는 시적 화자의 귀를 먹게 할 정도이며, 님의 얼굴은 시적 화자의 눈을 멀게 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시인은 이렇게 모순되고 과장된 표현을 통해 시적 화자가 '님'에게 매료(魅了)되어서 모든 감각기관이 '님'에게만 향하고 있는 상황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역설법을 통해 '님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4. 9행의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의 의미를 시적 화자의 태도와 관련하여 설명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시를 단순히 부분적, 분석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종합적, 유기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것이다. 시적 의미는 단어의 의미를 연결한다고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특히 시어는 다양한 표현법을 구사하여 어떤 의미를 제시하고자 한다. 또한 표현법 속에는 시적 화자의 의도를 담게 마련이며, 그 의도는 일정한 태도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교사는 표현법과 시적 화자의 태도를 시적 의미와 연관시켜서 파악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풀이 : 임은 이미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은 논리적 모순, 즉 역설이다. 임이 떠났지만 결코 임을 보내고 싶지 않은 절실한 심정이 그 속에 담긴 것이다. 이것은 임의 부재(不在)로 인한 체념을 넘어서는 태도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태도인 것이다. 따라서 체념적 태도를 극복하고 희망적 태도로 나아가기 위한 간절한 소망이면서 임이 다시 돌아올 것에 대한 강한 믿음을 표출한 것이다.
시야 넓히기
1. 다음 작품들에 등장하는 '임'의 의미를 분석해 보자.
(가)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 자시는 窓(창) 밧긔 심거 두고 보쇼셔. 밤비예 새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셔. - 홍랑의 시조 (나) 이 몸이 주거 주거 一百番(일백 번) 고쳐 주거, 白骨(백골)이 塵土(진토) 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향한 一片丹心(일편 단심)이야 가쉴 줄이 이시랴. - 정몽주의 시조 (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임께서 부르시면'에서 도우미 (가) 홍랑의 시조 : 홍랑은 삼당 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인 최경창(崔慶昌)과 깊이 사귀었는데, 북도평사(北道評事)로 와 있던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자 그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에, 그리는 마음을 시조로 달래고 버들가지와 함께 그에게 보내 주었다 한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버들가지에 새 잎이 돋아나듯, 자신을 기억하며 그리워해 달라는 작자의 아쉬움이 비유를 통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는 연정가(戀情歌)이다. (나) 정몽주의 시조 : 이성계가 역성 혁명을 추진하고 있을 때 이방원이 고려 충신인 포은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하여가(河如歌)'를 지어 보냈으나, 정몽주는 화답가로서 이 '단심가(丹心歌)'를 지어 읊었다.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작자의 일관된 신념이 나타나 있다. (다) 신석정의 '임께서 부르시면' : 이시는 신석정이 자연을 배경으로 한 목가적인 전원시를 쓰던 초기 시절에 나온 작품이다. 이 시에는 초기의 명상적, 전원적, 목가적, 시풍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현실을 초월하고 자연에의 귀의로 생의 경건한 기쁨을 누리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간절한 호소의 어조를 띤 부드러운 언어로 암담한 시대 상황을 벗어난 이상적인 전원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
지도방법 : 이 활동은 시어의 다의적(多意的)기능을 익히는 것이다. 시어의 의미는 고정적이지 않고 시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특히 문학 작품은 작가의 삶, 작품이 창작될 때의 시대 상황, 독자 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한 세 요소들이 배경 지식으로 활용되어야 시어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주지시키도록 해야 한다.
풀이 : (가)의 작가는 기생으로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짐을 슬퍼하는 내용을 시 속에 담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님'은 이성으로서의 애인(愛人)이다. (나)는 조선 건국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는 이방원의 시조에 화답한 것으로 정몽주의 애국 충절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의 '님'은 군주(君主)또는 구가(고려)이다. (다)는 시와 관련되어 특별히 알려진 사건이 없다. 우선 시적 상황마을 고려해 볼 때,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은행잎과 시적 화자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의 '임'은 생명을 관장하는 '절대자'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가 1931년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국'이나 '민족'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2. '님의 침묵'에 나타난 '님'의 의미를 '조국'이라고 생각할 때, 이 작품이 씌어진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이별 → 이별 후의 슬픔 → 희망으로의 전이 → 만남'의 의미를 설명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여러 가지 문학 작품의 이해 방법 중에서 특별한 관점을 선택하고 그에 따라 시상의 흐름과 시적 의미를 파악해 보는 활동이다. 따라서 우선 작품을 이해하는 다양한 관점, 특히 내재적 방법과 외재적 방법을 이해시키고 ,시대 상황과 관련된 반영론적 관점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런 뒤에 반영론적 관점에 따라 제시된 내용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풀이 : '님의 침묵'은 일제 시대인 1926년의 작품이다. 그리고 작가인 한용운은 독립 운동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님과의 이별'은 '빼앗긴 조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을 '이별ㅡ> 이별 후의 슬픔ㅡ> 희망으로의 전이ㅡ> 만남'에 적용시켜 보며,'국권의 상실(喪失)ㅡ> 국권 상실 뒤의 슬픔ㅡ> 국권 회복에 대한 믿음ㅡ> 국권 회복'으로 해석할 수 있다.
표현하기
다음에 제시된 경구와 속담은 일상 생활에서 널리 사용되는 역설적 표현이다. 살아오면서 이와 같은 표현을 적용할 만한 경험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고, 그 경험을 이야기해 보자.
(1) 바쁠수록 돌아가라.
(2)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3)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역설법을 정확히 이해한 뒤에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들이 역설법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제시된 속담들이 어떻게 역설법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시 답안 :
(1) "중학교 때 저는 늦잠을 자는 바람에 학교에 늦게 되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엄하셔서 지각하면 심하게 혼나기 때문에 저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앞뒤 안 보고 뛰었습니다. 횡단 보도에서도 좌우를 보지 않고 뛰다가 그만 오토바이와 부딪쳐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오토바이였기에 그만했지 자동차였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결국 저는 조금 더 빨리 가려다가 아주 늦고 말았습니다. 급할 때 오히려 여유를 갖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2) "제 삼촌은 지금 대기업의 사장이십니다. 그분이 젊었을 때 부장 자리를 놓고 다른 분과 경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경력이나 능력, 실적 등이 모두 엇비슷했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매우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때 제 삼촌은 동료와 지나치게 경쟁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시고 그 자리를 양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삼촌의 그런 태도를 오히려 높게 평가한 회사의 중역들이 그 후로 제 삼촌을 더 중용하게 되어 지금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다 먼 미래와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해 눈앞의 작은 이익은 양보하는 자세가 바로 '지는 것이 이기는 것' 아닐까요?"
(3) "꿩은 대부분 매에게 쫓기면 도망하기 바쁘다고 합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꿩들은 대부분 매에게 잡혀 먹이가 된답니다. 그런데 가끔은 오히려 매에게 대드는 꿩이 있다고 합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매에게 맞서는 것이죠. 그런 꿩들은 대부분 살아 남는 다고 합니다. 아마도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속담은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군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戀愛)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조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 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서문', 회동서관, 1926.
도우미
만해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의 맨 앞에 나오는 것으로, 이 시집 전체의 서문 역할을 한다.
독자(讀者)에게
독자여 나는 시인(時人)으로 여러분의 압헤 보이는 것을 부끄러합니다.
여러분이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슯어하고 스스로 슯어할 줄을 암니다.
나는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子孫)에게까지 읽히고 십흔 마음은 업슴니다.
그때에는 나의 시를 읽는 것이 느진 봄의 꼿숩풀에 안저서 마른 국화(菊花)를 비벼소 코에 대히는 것과 가틀는지 모르것슴니다.
밤은 얼마나 되얏는지 모르것슴니다.
설악산(雪嶽山)의 무거운 그림자는 엷어감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짐니다. (을축(乙丑)8월19일밤 꼿)
-한용운, '님의 침묵', 회동서관, 1926.
(출처 : 김윤식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지도서')
이해와 감상
이 시의 어법은 임이 떠나 버린 슬픔을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듯한, 아니면 혼자서 독백을 하는 듯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임에 대한 사랑과 기다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경어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내용을 더욱 호소력 있게 전달한다. 작품 전체에 사용된 비유의 기법도 정서를 고양시키고 심미감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황금의 꽃'과 '한숨의 미풍',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 '꽃다운 님의 얼굴' 같은 감각적 표현도 이 시의 심오한 주제 의식을 독자에게 친근한 것으로 바꾸어 준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님의 침묵에 대한 화자의 태도이다. 화자는 님이 떠나가 버렸고 현재 침묵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 속에는 님이 생생히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적 사유에 바탕을 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것은 조국 상실의 시대적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한다.
이해와 감상2
이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라는 역설의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는 현상적으로는 임의 부재(不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항상 나와 더불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일체 중생 실유 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갖추고 있다.)'이라는 대승 불교의 가르침이 좋은 참고가 된다. 즉 현상적으로 볼 때 불성은 은폐되어 있고 속세의 때에 찌든 중생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생의 깊은 내면에는 항상 불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은폐되어 있는 불성을 현재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생 자신의 깨달음과 구도적 실천이다. 마찬가지로 만해의 '임'은 형상적으로 부재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항상 '나'와 더불어 있고, 은폐되어 있는 '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임'과 '나'의 합의를 위한 구도적 실천이 강조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만해는 이처럼 불교적 사유에 기대어 자신의 시 속에서 사회. 역사적인 실천과 종교적인 실천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시의 진술 방식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 시의 유장한 산문적 리듬은 만해의 깊은 시적 사유와 형이상적 주제의식을 형상화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그리고 곱고 섬세한 우리말 표현, 경어체의 진술 방식 등은 만해가 내세운 시적 화자(여성 화자)의 성격과 긴밀하게 조응되면서 시어의 형상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심화 자료
'임'의 상징성과 만해의 시 쓰기
시집 '님의 침묵' 서문에 해당되는 '군말'은 만해의 '임'에 내포된 상징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단서가 된다. '군말'에서 만해의 '임'과 자신의 시 쓰기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임만 임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임이다. 중생이 석가의 임이라며 철학은 칸트의 임이다. .......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해매이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이렇게 보면 만해의 '임'은 어떤 고정된 실체라기보다는 섣불리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포괄적 존재로 보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임'은 항상 '나'의 실천적 요구에 의해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를 가졌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해의 '임'은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고, 중생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란 존재가 무수한 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그 관계 속에서 '나'의 실천적 요구가 형성되듯이 '임'또한 그와 같은 관계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해의 '임'을 '나'의 의지나 욕구와 무관하게 항구적으로 고정 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만해 시의 풍부한 내포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만해의 시의 문학사적 의의
만해의 시는 주요한, 김억 등을 통하여 모색, 실험된 한국 현대시의 수준을, 그 형태와 시정신 면에서 한 단계 올려놓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만해는 불교적 사유와 상상력에 기초하여 우리 시의 전통에서 부족했던 형이상학적 깊이를 시에 더해 주었다.
"님의 침묵" 작품 분석
전 10행의 산문율을 지닌 시로 종결 어미는 모두 경어체를 차용하여 여성 어조를 띰으로써, 애절한 사랑의 정감이 더욱 깊게 느껴지는 작품인데 각 행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기로 한다.
1행은 님이 떠나갔다는 현실 인식에서 시작된다. 님이 갔다는 사실은 화자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는 것이 반복을 통해 토로되며, 직설적 진술에서도 그 충격의 크기를 짐작하게 된다.
2행은 님이 떠날 때의 상황을 제시한다. '푸른 산빛'과 '단풍나무 숲'의 대조에서 절망에 빠진 화자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푸른 산빛'이 여름과 무성함을 표상한다면 '단풍나무 숲'은 가을과 쓸쓸함을 표상한다. 그러하다면 푸른 산빛의 계절은 나와 님과의 사랑이 충만하던 시절이 되며, 단풍나무 숲의 계절은 헤어짐의 쓸쓸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한 쓸쓸한 공간으로 나 있는 작은 길을 걸어서 님이 떠났다는 사실이다. 극화된 헤어짐의 장면이다. 멀리 사라져 가는 길이 주는 소멸감은 님을 떠나 보낸 화자의 상실감을 드러낸다.
또 그런 길을 '참아' 떨치고 갔다는 사실에서 사랑의 파탄이 사랑 자체의 파탄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참아'는 중의적이다. 부사 '차마'와 인내의 뜻 '참아'가 결합되어 있다. 차마 어쩔 수 없이 님이 떠나갔을 수도 있고, 아픔을 꾹 참고 떠났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결국 우리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깨어질 수밖에 없었음이 분명해진다.
3행은 계속되는 절망감의 표출이다. 님과 나의 맹서가 깨어지고 만 슬픔의 크기를 광물 이미지로 포착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황금의 꽃'이라는 은유는 광물과 식물의 결합에서,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견고하고 변하지 않는 사랑의 절대성을 표출한다. '차디찬 티끌'에서 '차디찬'이란 촉각 이미지는 사랑이 화자에게 준 절망의 정도를 보여 준다. 한숨의 미풍에 과거의 꿈이 사라지고 말았다는 회한의 심정이 노출되고 있다. 한숨의 미풍은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허무의 표상이다. '황금의 꽃'에서 보이는 견고한 이미지와 이 미풍의 허망한 이미지의 대립이 드러난다.
4행. '날카로운 첫 키스'는 물론 님과 나의 만남을 뜻한다. 그러나 그 만남(키스)을 날카롭다고 한 데서 님과의 사랑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고, 나의 온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정도의 충격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아뜩할 정도로 사랑은 강렬하게 찾아왔고, 그리하여 나의 님이 가고 없다는 상실의 재확인이다. 날카로운 키스라고 한 데서 님과 나의 만남이 단순한 애정에 의한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 달콤한 키스가 정감을 불러오는 데 반하여 날카로운 키스는 정신적 충격의 의미가 더 강하다. 여기에서 일이 다층적(多層的) 실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화자는 님에게 절대적 사랑을 바친 것이다.
5행도 님이 나에게 절대적 존재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눈멀고 귀멀 정도의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에 차라리 눈멀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차라리 귀멀었다는 표현은 역설이다. 이 역설은 사랑의 절대성을 극도로 높이는 효과를 준다.
6행. 사랑하면 헤어질 날이 오는 것이 엄연한 법칙[會者定離(회자정리)]이라 염려하기는 했지만, 뜻밖에 찾아온 이별 앞에 슬퍼하는 화자의 심정이 표출되어 있다.
7행은 반전(反轉)이다. 이별을 슬픔으로만 인식하면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이 되고 말며, 그렇게 될 때, 우리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나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 되므로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것을 알기에 크나큰 슬픔의 힘을 옮겨서 희망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적 지양이다. 정신적 극복의 한 수단으로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하는 화자의 내적 극복 방식을 알게 한다. 이는 만해 특유의 사유 방법이다. <님의 침묵> 88편의 시상(詩想)은 모두 변증법적 극복의 논리에 의한다. 그것은 불교적 사유가 그렇기 때문이다.
7행의 사유 전환은 8행으로 이어진다. 6행의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절망은 거자필반(去者必反)의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교의 윤회설이 바탕에 깔려 있다. 윤회설은 존재는 일정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으며, 여러 가지의 양태로 변전되는 것의 우주의 섭리라고 말한다. 제행(諸行)은 무상(無常)하고 신생은 유전한다.
9행. 님과 나의 사랑은 파탄에 이르지 않았다는 자기 선언이다. 현실적 상황으로는 사랑의 관계가 파탄되었지만, 정신적으로 이어진 사랑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으며, 내가 그 정신적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 한 사랑은 지속된다는 승화된 인식의 표출이다.
10행. 그렇기 때문에 내 충만한 사랑의 기쁨에서 솟구쳐 나오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부재에도 넘쳐나기만 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만해는 님의 부재 공간을 정신적 사랑으로 메우려고 한다. 님의 부재 충격이 크면 클수록 더 큰 사랑의 노래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적 차원의 극기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엄청난 역설에 의한 정신적 극복만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해 시의 우수성은 이렇게 정신적 지양의 태도가 서정적 시어로 표출되고 있는 점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이 작품은 곧 '나의 사랑'임을 만해는 노래한다.
한용운 시에서의 '님'의 상징적 의미
이 시는 상상력의 구심점이 되는 '님'이 누구이냐에 따라 시의 내용이 주제가 달라질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은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님'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로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것들은 개별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을 통해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절대적 존재로서 '그리움'의 대상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는 '조국', '절대자', '사랑하는 연인' 등의 어떤 유일한 답을 가져다 맞추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 방법은 모두 적절하지 않다.
한용운이 시집 '님의 침묵' 서두에 말하였듯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사랑스러운) 것은 다 님'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님은 일단 그 표면적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연인이면서, 우주 만물의 근원에 있는 참다운 원리이기도 하고, 역사적 의미로는 조국이거나 민족일 수도 있다. 가장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그의 님이란 사람의 삶을 삶답게 하여 주는 모든 가치의 총체를 의인화한 것이라 할 만하다.
다만 그의 생애와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억압된 상황에서 괴로워하던 민족의 삶이었던 만큼 '님의 침묵' 내지 '님의 부재(不在)'라는 그의 시의 주제는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떠나서는 온당하게 해석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한용운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김소월의 시를 비교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김소월의 시에도 '님' 또는 이에 해당하는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그 님이 현재 '나'와 함께 있지 않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대조적이다.
김소월의 시에 나타나는 님은 죽었거나 아주 멀리 떠나가서 돌아올 가망이 없는 님이다. 그의 시가 대개 돌아올 가망이 없는 님이다. 그의 시가 대개 애절한 슬픔과 한의 빛깔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에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만이 있다고 할 때 절망적인 비탄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에 비해 한용운은 비록 지금 여기에 님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믿음을 노래한다. 님의 돌아옴을 믿기 때문에 그의 시는 끝없는 절망에만 빠지지 않으며, 마침내는 슬픔을 극복하고 희망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슬픔과 절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돌아오고야 말 님을 향해 솟아오르는 사랑의 힘을 노래한다. 이와 같은 차이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은 두 시인이 가졌던 현실 감각과 역사 의식에서 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용운의 '님'과 김소월의 '님'
한용운의 '님'이 가진 속뜻을 생각하면서 같은 시대에 살았던 김소월의 '님'을 비교할 가치가 있다. 김소월의 시에도 '님' 또는 이에 해당하는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그 님이 현재의 '나'와 함께 있지 않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시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아주 대조적이다.
김소월의 시에 나타나는 '님'은 죽었거나 아주 멀리 가서 돌아올 가망이 없는 님이다. 그의 시가 대개 애절한 슬픔과 한의 빛깔을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하는 님이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나에게는 기약 없는 기다림만이 있다고 할 때 절망적인 비탄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에 비해 한용운은 비록 지금 여기에 '님'이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며,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는 믿음을 노래한다. 님의 돌아옴을 믿기 때문에 그의 시는 끝없는 절망에만 빠지지 않으며 마침내는 슬픔을 극복하고 희망에 도달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슬픔과 절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돌아오고야 말 님을 향해 솟아오르는 사랑의 힘을 노래한다. 이와 같은 차이는 여러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겠지만, 그 가장 중요한 부분은 두 시인이 가졌던 현실 감각과 역사 의식에서 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詩)와 선(禪)이 만나는 지점
선(禪)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선 그 자체가 아니라 선을 지향하는 기미를 지니는 것을 말한다. 이런 단서는 언어로서 선(禪)이라는 정신적 차원을 담아내는 일이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전제하에 시와 선의 관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기인된다.
‘언어도단’이라든지 ‘불립분자’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선적 경지의 깨우침을 전하려는 선사들의 오도송에서 또는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선시 또는 선적인 경향의 시들은 쓰여져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에 대한 부정적 견해 이면에 ‘불립문자’로 말해지기도 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여기에서 선적 통찰과 언어적 직관의 만남이라고 할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예술적 성취가 가능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선의 경지란 문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면서도 결코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는 사유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전해줄 길이 없다고 하는 이중의 문제를 함께 안고 있기 때문이다. 선시는 이러한 문제의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 번뜩이는 섬광이나 예기치 못한 돌발성, 침묵과 여백, 부지중에 상대의 허를 치는 기지 등을 동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유한한 도구 속에 무한의 의미를 담아내야 하는 어려움이며, 언어로서 언어의 감옥을 분쇄하고 날아오르고자 하는 자유에의 의지로 볼 수도 있다.
이는 곧 생명이 생명다움의 우주적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이자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궁극적으로 존재와 욕망의 구속으로부터 탈출하는 정신의 자유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자본주의 팽배에 따른 무한욕망 논리의 확산으로 사람의 정신적 가치가 축소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욕망의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기계화, 물질화, 자동화의 가속도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갈수록 가벼움과 자유로움을 잃어 갈 뿐 아니라 생명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적 상황에 당면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처하는 대안의 하나로 불교적 명상의 소중함과 정신의 자유를 갈망하는 현상이 역설적으로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에 와서 우리 현대시의 중요한 시적 경향이 상당부분 불교적 성향 또는 선시적 경향으로 선회하거나 그런 지향성을 뚜렷이 나타내 보이고 있는 현상은 그러한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누구나 궁극적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고 해서 모두가 정각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선시 또한 아무나 원한다고 쉽게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구도적 체험이 동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선에 대한 지식이나 경전에 대한 해석만으로는 오히려 선이라는 본질에 문자의 해독을 덧칠하는 격이 되기 십상이라는 어려움이 놓여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와 선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 어디쯤이 되었든 선은 존재와 우주의 실체에 대한 해답을 추구하는 수행의 방법으로서, 또한 시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 우주만물의 실체와 만나고자 하는 성향을 본래부터 지니고 있음으로 해서 그러한 선적 지향성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된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은 현대물질문명의 위기 속을 살아가는 존재로서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불연속성과 불확정성의 시대임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시정신의 근본이 바로 그러한 선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울러 시와 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 현대시에서 선적 경향이란 특정 시인만을 분리해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시인들의 시에서 또한 주요 시인들에게서 부분적 또는 지속적으로 형상화되어 왔으며 현재도 그것은 시가 얻어 내고자 하는 한 높은 고지의 한 정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출처 : 김재홍 : 서울대 국문과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현재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로 <한용운문학 연구><한국현대시인 연구><현대시의 사적 탐구>등이 있다. http://www.budreview.com/html/1/1-nondan-kimjaehong-1.htm)
'님'의 침묵에서의 역설
역설이란 패러독스를 말하는데 ‘공인된 의견에 반대되는 진술, 즉 비록 모순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진술’을 뜻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사실은 진리나 진실을 말하는 표현기교입니다. 영랑의 ‘찬란한 슬픔의 봄’ 만해의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역설은 겉보기에 모순(矛盾)되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진실을 담고 있는 진술을 가리킨다. 역설은 어원적으로 '...넘어선(para)'과 '의견(doxa)'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그것은 애초부터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선 의미, 즉 '모순 속에 내포된 진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모순되는 성질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모순되는 말이 오히려 세상 만물의 실상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거나 정확하게 표현할 때가 있으며, 독자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보다 폭넓게 보도록 유도하며, 인식의 폭을 확대시키는 경향도 있다. 이러한 역설에는 표층적 역설과 심층적 역설의 두 가지가 있다. 표층적 역설은 흔히 '모순 어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문장의 표면에 주로 나타난다. 심층적 역설은 그것이 지닌 모순의 의미를 일상적 논리로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역설이다. 표면적인 진술과 그 심층에 내면화된 의미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모순이 놓여 있다. 시인은 이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되는 의미론적 긴장을 통해 보다 차원 높은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심층적 역설은 다시 존재론적 역설과 시적 역설의 두 종류로 나뉘어 진다. 존재론적 역설이란 삶의 초월적 진리를 내포한 역설이고, 시적 역설은 작품의 구조적 의미가 반영된 역설을 말한다. 심층적 역설은 작품 전체의 틀이 논리적 모순을 보이는 것을 말하는데 이 시에서 만남과 떠남을 같은 차원에 놓고 바라보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표층적 역설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저 깊은 곳으로부터
철철 넘쳐 흐르는 빛을 보라 -허형만「이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
·돌아보고 있느니 처음이 있기 전의 처음을
사랑이 없는 나의 사랑의 완성을 -이성부 「모래의 생애」
·손으로 닦아 지우고
다시는 입맛 짧게 다시는 무미의 맛 -홍신선 「노인」
·어둠으로 녹지 못할 때는
차라리 불이 될 수밖에 없나니 - 한광구 「어둠의 중심에서」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은 밝아진다 - 최원규 「바다와 새」
·노을 이쪽은 눈물의 세상
찬란한 괴로움이 머무는 곳 - 신협 「저녁 노을
·산은 바닷물 위로 달려가고
바닷물은 산 봉우리로 흐르니 - 홍희표 「구름잡기」
심층적 역설의 예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나에게 생명을 주던지 죽음을 주던지 당신의 뜻대로 하세요
나는 곳 당신이에요 - 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한용운 「복종」
이상 인용시들은 불교의 역설적 세계관 즉 불일불이(不一不二) 혹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진리를 표현했거나 윤회전생(輪回轉生) 혹은 연기론적(緣起論的) 존재관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진리를 표현한 앞의 진술들은 단지 수사법의 차원에서만 머무는 표층적 역설과는 그 본질이 다르다고 할 것이다.
시적 역설의 예는 다음과 같다.
시적 역설은 작품의 구조적 의미가 반영된 역설을 말한다. 표면적 진술과 그것이 암시하는 내적 의미 사이에 구조적 모순이 있는 경우이다. 즉 시인은 표면적 의미와 정반대되는 의미를 작품에 내면화시키고 이 모순의 관계에서 야기되는 의미론적 긴장 속에서 시적 가치를 창조해 낸다. 그 예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들고 있는데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의 지시적 의미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현인데 그 구절의 함축적(심층적)의미는 ‘너무나 슬픈 상황’이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상황적 역설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설법이라는 말보다 상황적 역설이라는 말을 쓸 수는 있겠지만 역설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기타 역설의 예
(1) 고은 시 <기(旗)> 중
우리에게 이 어둠이 얼마나 환희(歡喜)입니까?(화자는 어둠을 역설적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곧 현실 극복의 의지적 표현임)
(2) 구상 시 <초토의 시>8 중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다.
(3) 김수영 시 <폭포(瀑布)> 제5연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높이도 폭도 없는 폭포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의 폭포는 객관적 위치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위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4) 김영랑 시 <두견>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린 것을
이른 봄 수풀이 초록빛 들어 풀 내음세 그윽하고
가는 댓잎에 초승달 매달려 애틋한 밝은 어둠을(모순형용)
(5) 김영랑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모순형용)
(6) 김현승 시 <눈물>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7) 박두진 시 <묘지송> 중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
살아서 섧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삶에 대한 강한 긍정을 내포하고 있다. 죽음(주검)이 음산하고 허망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8) 서정주 시 <견우의 노래>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높았다, 낮았다, 출렁이는 물상과
물살 몰아 갔다 오는 바람만이 있어야 하네
(9) 신경림 시 <농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자조와 한탄이 신명으로 전환되고 있다. 겉으로는 흥겨움이지만 분노의 감정이 역설적 상황 속에서 표출되고 있음)
(10) 윤동주 시 <십자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순형용 : 고통스럽게 죽어간 그리스도가 행복할 리는 없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고통을 감내한 그리스도가 '나'에 비해서는 행복한 것이라고 견주어 역설적으로 말한다.)
(11) 유치환 시 <깃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모순형용)
(12) 윤동주 시 <또 다른 고향> 제2연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13) 이육사 시 <절정> 제4연(마지막연)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일제의 억압(겨울)이 강하면 강할 수록 극복의지도 강해짐.)
(14) 정지용 시 <유리창1>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서로 상반된 정서(별과 같은 '아름다움', 죽은 아들에 대한 '서글픔')를 수식관계로 표현하는 모순형용, 곧 역설)
(15) 조지훈 시 <승무> 중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16) 한용운 시 <찬송>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17) 이형기 시 <낙화>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18) 이은상 양장시조 <소경 되어지이다> 전문
뵈오려 안 뵈는 님 눈 감으니 보이시네
감아야 보이신다면 소경 되어지이다.
(19) 신경림 시 <목계장터>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 하네 (천치가 되어 아무 고달픔 없이 살고 싶은 마음의 역설적인 표현)
(20) 한용운 시 <이별은 미의 창조>(이별이 있어야만 아름다움이 있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관의 반영)
(21) 박종홍 논설문 <학문의 목적>(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말로 표현하듯이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구불변의 도가 아니다.)
(22) 박지원 문집 <열하일기> 중에서
삼류하를 건너서 냉정(冷井)에서 아침을 먹다. .... (중략)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아, 통곡하기에 참 좋은 곳이로고!" 한번 통곡할 만하구나!" 했다. 정 진사가 "이렇게 천지간의 위대한 광경을 만나서 갑자기 통곡하고 싶다니 웬 말씀이오?" 한다.(사람은 칠정(七情)이 극에 달하면 모두 통곡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다음 대답으로 미루어 참뜻이 숨어 있음. --- <오욕칠정>)
(23) 장용학 소설 <요한 시집> 중(작품 속의 누혜는 "자유의 길을 막고 있는 벽(壁)을 뚫고 나가기 위해 자기 자신을 전쟁에 던져 포로가 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하나의 각성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부자유(不自由)를 자유주의로 받아들이는 이 제3노예가 현대의 현대의 영웅이라는 인식"이었다. 자유라는 것도 참된 인간이기 위한 최종의 장소가 아니라 그 뒤에 올 참된 것을 위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도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혜는 철조망에 목을 매고 죽는다. 여기서 철조망은 역설적으로 '자유'를 상징한다.)
(24) 하근찬 소설 <수난이대>
갑판 위에 올라가 보니 하늘은 활활 타오르고 있고, 바닷물은 불에 녹은 쇠처럼 벌겋게 우쭐렁거리고 있었다. 지금 막 태양이 물 위로 뚝 떨어져 가는 것이었다. 햇덩어리가 어쩌면 그렇게 크고 붉은지 정말 처음이었다. 그리고 바다 위에 주황빛으로 번쩍거리는 커다란 산이 둥둥 떠 있는 것이었다. 무시무시하도록 황홀한 광경에 일동은 딱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만도는 어깨마루를 버쩍 들어올리면서, 히야-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그처럼 좋아할 건덕지는 못되는 것이었다. (박만도, 섬에 도착함. 전개부)[일몰의 놀라운 광경에 도취된 상태이며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더위, 강제노동 등)과는 내용상으로 대조를 이룸]
(24) 기타
1)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복음] 산상수훈(山上垂訓) 중 )
2) 유마의 한 침묵이 만 개의 뇌성소리니라 ( [유마경] )
3)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엘리어트 [황무지])
4)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이다.
5)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6) 철학은 일상적이면서 비일상적이다.
7) 공공연한 비밀
8)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9) 차가울수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10)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조지훈의 승무)
11)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상황적 역설법을 역설법이라 하지 않고 반어법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데 이견이 있음.)
비유와 상징의 차이
비유와 상징은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비유는 그 구조가 아무리 복잡한 것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원관념에 해당하는 뜻의 파악이 가능하나, 상징은 원칙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비유가 원관념과 보조관념간에 1:1의 대응 관계를 지니지만 상징은 보조 관념이 여러 가지 원관념으로 쓰일 수 있는 다의성(多義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솜이불을 덮고 선 겨울 나무'라는 표현에서 솜이불의 원관념은 '눈(雪)'이 분명하므로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다. 하지만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의 '님'은 연인이나 조국에 한정되지 않고 여러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상징 |
은유 |
① 암시적, 다의적이다 ② 한 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③ 상징 의미가 상징 뒤에 숨어 있다. |
① 비교, 유추적이다. ② 한 편의 작품에서 1회적으로 나타난다. ③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관계가 명확하다. |
'님의 침묵'에서 이별한 임에 대한 그리움이 임을 기다리는 강력한 희망의 의지로 전환되고 있는 행을 찾아보자.
교수 학습 방법 :
'님의 침묵'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앞 부분에서는 임과 이별한 현실에서 느껴지는 아픔을, 뒷 부분에서는 그 아픔을 딛고 임과 다시 만나겠다는 다짐을 이야기한다. 시 전체에서 가장 급격하게 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부분을 찾아보도록 하고, 문제를 어렵게 느끼는 학생들의 경우 '그러나'라는 접속사의 일반적인 쓰임에 착안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7행부터 시상이 급격하게 전환된다. 시적 화자는 앞부분에서 임과의 이별을 이야기하고 그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데 반해, 뒷부분에서는 불교의 윤회론에 기대어 임과의 새로운 만남을 확신하고 있다. 즉 역접의 기능을 하는 접속사 '그러나'를 전후로 하여, '님은 갔습니다'로 요약되는 이별한 임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와 같이 강력한 희망의 의지로 전환되고 있다.
'님의 침묵'에서 '님'의 상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가정할 경우, 시의 전체적인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지 정리하여 발표해 보자.
교수 학습 방법 :
'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님'과의 이별 앞에서 재회를 다짐하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 또한 달라진다. 이 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한 편의 시를 놓고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혼자서 시를 읽을 때에도 하나의 정해진 답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읽을 수 있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님'의 상징적 의미 |
시의 전체적인 의미 |
종교적인 절대자(부처) |
'님' 이 상징적 의미라면 이 시는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종교적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쉼 없는 자기 수련의 과정을 겪어야 하며, 시적 화자는 그러한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
일제에 빼앗긴 조국 |
'님'을 조국으로 해석한다면 이 시는 조국 광복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님'이 갔다는 것은 국권 상실의 현실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 있다. 작가가 독립 운동가로 활동했었다는 전기적 사실에 주목할 때 가능한 해석이다. |
사랑하는 여인 |
'님'을 시인이 사랑했던 여인으로 볼 수 있다. 평범한 연인들처럼 시적 화자도 사랑했던 사람이 떠난 아픔과 슬픔을 겪으면서,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을 추억하고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연가풍의 어조가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