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로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음으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은 "거지는 인격(人格)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生命)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罪惡)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어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야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왼갖 윤리(倫理), 도덕(道德), 법률(法律)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人間歷史)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서릴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요점 정리
지은이 : 한용운(韓龍雲)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명상적, 상징적, 산문적,
특징 : 연가풍이고 구체적 현실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표현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고, 산문에 가까운 긴 호흡의 시구를 구사하여 유장하고 침통한 느낌을 주고, 대화체의 직설적 표현을 사용하여 더욱 절실한 느낌을 줌.
율격 : 산문투의 긴 호흡
어조 :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비분과 애소가 어조로 '임'만을 의지하려는 여인의 애조 띤 목소리 즉 여성적 어조
심상 : '주인', '장군', '칼', '황금' 등 상징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됨
구성 :
1연 당신을 잊을 수 없음
2연 거지인 '나'에 대한 주인의 모멸
3연 장군의 능욕과 자신에 대한 자책
4연 절망 속에서 당신을 발견
제재 : 당신
주제 :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과 일제에 대한 끈질긴 저항 의지, 조국 광복의 염원과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 굴욕적인 삶의 극복과 진정한 가치 추구
출전 : <임의 침묵>(1926)
내용 연구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로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당신이 가신 뒤로 - 위험이 많습니다 : 임이 나를 떠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당신은 구체적으로 조국을 의미함]
나는 갈고 심을 땅(조국, 국권의 상징)이 없음으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 없습니다. : 국토를 송두리째 상실했습니다. 또한 일제의 수탈로 경제적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 : 일제 = 장군, 황금과 호응)은 "거지는 인격(人格)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生命)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罪惡)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어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그 말을 듣고 - 당신을 보았습니다. : 멸시를 당하고 돌아서 나오는 순간 조국의 의미를 생각했으며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당신으로 인해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야 민적(民籍 : 그 나라 국민으로서의 호적)이 없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 조국과 집을 상실하고, 호적마저 빼앗겨 보호받을 아무런 장치가 없는 극한적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 : 절개와 지조, 여기서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음을 뜻함)냐." 하고 능욕(凌辱 : 업신여기어 욕보임)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그를 항거한 뒤에, - 당신을 보았습니다. : '그'는 일제(日帝)를, '항거'는 3.1 운동을 가리킨다. 3.1 운동의 실패로 인해 조국 광복 운동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는 뜻이다]
아아 왼갖 윤리(倫理), 도덕(道德), 법률(法律)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烟氣 : 문맥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허망한 것'. 즉 무(無)의 의미임]인 줄을 알았습니다.[아아 왼갖 윤리(倫理), - 알었습니다. : 윤리, 도덕, 법률 같은 것들이 모두 치욕적인 삶 속에서 황금(부→'주인')과 칼(권력→'장군')에 봉사하는 허망한 것, 곧 무(無, 연기)와 같은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즉, 화자는 사회의 온갖 규범이 지배자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한 헛된 징표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현실에 처절하게 절망하고 죽음의 품에 뛰어들까, 죽음으로의 도피), 인간 역사(人間歷史)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서릴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인간 역사(人間歷史)의 - 술을 마실까 : 허위와 불의, 부정으로 전개된 역사를 그 처음부터 부정해 버릴까, 그리고 어떤 희망도 찾지 말고, 술을 마시고 자포자기하며 현실을 도피할까]
이해와 감상
시는 만해의 시들 중에서 시대적 현실과의 연관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두드러지게 시에 나타나는 작품이다. 즉 이 시에서는 민적도, 인권도 없다는 이유로 천대받고 능멸당한 여인의 극한적인 절망과 비분 속에서 역설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시적 상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상황은 '임의 부재'를 '임의 존재'에 대한 자각의 계기로 파악하는 만해 고유의 변증법적 상상력의 소산이다. 따라서, '당신'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의미(조국, 민족)과 보편적인 의미(부처 중생 진리 등)의 양극(兩極) 사이를 오가면서 풍부한 의미의 생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해와 감상2
이 작품은 전 3연으로 되어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제1연, 제2연∼제3연의 제3행, 제3연의 제4행∼제5행까지의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신'은 만해의 다른 시에서 흔히 등장하는 '님'과 같은 존재로 파악된다. 따라서, 그것은 연인이나 깨달음, 부처 혹은 조국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조국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첫째 단락은 조국을 잃음으로 해서 치욕을 당해야 하는 민족의 하소연이라 볼 수 있다. 둘째 단락은 치욕과 항거와 그 항거의 실패로 말미암은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다. 셋째 단락에서는 윤리니 도덕이니 법률이니 하는 것들이 강자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였지만 바로 당신이 계심을 알기에 그 절망감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조국의 광복이 객관적으로 어려운 상황일수록 광복을 위한 주관적 의지는 오히려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이 깨달음이야말로 만해가 조국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시의 표현상 특징은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깔고 있으며, 산문에 가까운 긴 호흡의 시구를 구사함으로써 유장하고 침통한 느낌을 주고, 대화체의 직설적 표현을 사용하여 더욱 절실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심화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