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의 아침을
눈은 나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소리 또한 그윽하므로
네 이마를 숙이고 빌가 하노라
님이여 서른 빛이여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는가
눈은 나리여
우리 함께 빌때러라.
-박용철(朴龍喆)의<눈은 내리네>-
한 겨울 나리는 눈낱, 그날 그 아침에 소복히 쌓이는 눈발은 하늘의 축복속에 맞이하는 듯, 포근함에 싸이지요. 이마를 숙이고 맞대어 그리운 님을 그리는 소망, 그대의 입술을 하얀 눈발과 상견(相見)하려는 대조법(對照法)이 시인의 감성이라고 할까, 그 눈속은 하얀 마음으로 염색되고 모든 과오와 행복까지도 감싸 줄 듯한 행복감을 자아 낸다. 이 역시 지성과 서정을 가미한 작품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하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金永郞),<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 기다리려는 마음, 그 기다림의 보람과 지고 만 낙화의 쓸쓸함, 화려했던 꽃이 어느 새 지고 그 진 꽃잎이 시들더니 감쪽같이 사라지는 아픔을 시인은 눈으로 보고 가슴저리게 여긴다.
그것을 보다 고고하게 높은 음절로 싯귀(詩句)를 만들었다. 아름다운 언어로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면면하고 구구절절한 시인의 심성! 서정적 심화(深化)의 과정이요 결과이다.
일생동안 사랑하던 사람을 잊지 못하거나 영원한 아픔을 치유할 기다림으로 참아넘기는 심정처럼 외롭고 고독하고 애처로운 것은 없으리라.
모란을 단념하지 못함은 곧 그리움을 단념하지 못함과 같은 맥락이다. 또다시 오는 봄 그 꽃 떨기를 보려는 그리움이 소박하고 정결하고 아릿다운 감정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 그리고 솔직하고 순수한 시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서정시든 모던이즘이든 지성주의 시든 어느 시든 간에 시인의 가슴과 눈의 매혹성(魅惑性)에 달려 있다.
<모든 것에는 제 사이즈 나름의 것이 있다.-중략- 고뇌의 연금술을 자부하고 출발한 시인이건, 세상만사가 단편적인 푸로시안 맨(Protean man)의 소일(消日)을 위해 시를 쓰는 사람이건 간에 일상의 되씹는 수다스런 못지 않게 수다스런 언어의 시를 내놓게 되는데 그들에게 공통되는 것은 시의 성공을 자축하는 자의(恣意)의 스텐다드 이다라>고 박석기(朴石基)는 언급했다. 시를 쓰는 사람들 끼리끼리, 서정파니 감성파니 하는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서정주의에도 모더니즘이 깔려있고, 휴머니즘이 깔려있고, 슈르적이거나 심지어 사인언틱한 언어묘사도 가미될 수 있다. 다만 시어는 언어의 조작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의 세밀한 여과인 것이다. 서정주의는 언어의 보드라운 감미가 다양하고 짙다는 데 있다. 어느 시가 자축 할 만큼 특별히 성공적이다라는 의미는 부여 될 수가 없다.
언어 구사에서 시로 승화시키는 과정은 각기 제 나름대로의 시적 감성에 달려 있다. 위에서의 박용철의 시에서나 김영랑의 시에서 보는 것은 각기 자기 사이즈 포인트에 맞춰 시를 쓰는 것이다.
눈(雪)을 보고 죄를 씻고자하는 사람의 시각이이 있고, 눈(雪)을 보고 사랑을 연민하는 시각도 있고, 모란을 보고 죽음을 향한 윤회를 비는바도 있고, 모란이 지는 모습을 보고 새로운 탄생을 기다리는 시각도 있을 수가 있다.
여타 많은 생각과 차이에 따라서 시상(詩想)의 폭은 한 사람에게서도 무한한 것이다.
이에 부언하여 <하인츠. 피온테크(크로츠부르크 태생/1925-)>가 거론한 것을 인용하면 시작의 실제(詩作實際)에 관하여 그의 서정시론(抒情詩論)은 다음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서정시인이 깔끔한 사람이라면 수사학(修辭學)과 관계가 있는 일이라고 대답 될 것이다. 자기 개인의 관찰이라든지, 감동적 경험을 바탕으로 노력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높은 의식상태, 그래서 시를 격조높게 쓸 것이라고 본다면 서정시를 쓰는 동기와 노력도 그런 이유와 원인에서 일 것이라>는 설명을 하였다.
예를 들자면 <폴. 발레리> 같은 시인은 운동연습을 하는 사람이 끊임없는 노력을 쌓듯 자기성찰이라고 하는 것을 방버론의 입장에서 가장 높은 의식상태까지 몰고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시인은 <진주를 캐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시인이 그저 진주를 캐는이에 안주 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비유에만 좌초되고 말 것이다. 바다 밑바닥에 숨겨 있는 진주를 캐는 사변적(思辨的)인 마음을 던져 눈을 부릅뜨고 고뇌한다면 그것이 좋은 진주를 캐는 마무리가 될 지도 모른다.
진주를 캐는 일이란 배워 익힐 수가 있지만 그건 기초기술적인 면에서의 일이고, 실제 진주를 캐는 일이란 행운에 속한다고 볼 것다. 그럴랴며는 그저 한 두 편의 시를 쓴다고 해결되어 행운이 주어질까?
내가 고른 소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수 많이 잡아서 닦고 갈고 볶고 끓이고 하여서 시로서 탄생시켰다. 그런 소재를 내가 무슨 재주로 진주를 캐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남다른 사고와 집착력과 인내력 없이는 이룩 될 가망이 없을 것이다.
공상, 감동 ,형상, 추정, 잠재의식, 영혼 그 무엇에라도 찾아 헤매여야 한다는 과제는 우연히 만나는 것 같으나 끊임없는 작동속에 그 노동의 댓가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평생 초동시인(初動詩人)으로 머무를 수 밖에 없을 뿐이다.
서정시에 대하여
시의 본질을 말할 때 시의 정의를 내려야 하고, 시의 특징을 내려야 하고, 또한 시의 구성요소를 말해야 하고, 시어와 시의 리듬을 말해야 하고, 시의 이미지를 생각해내야하고, 시의 표현의 기교를 말해야 한다. 또한 시의 주제라는 것도 빼어놓을 수가 없는 분야이다.
거듭 말해서 시의 종류에서 시 형태상의 종류를 정형시, 자유시로 구분 할 수가 있음에 시 내용상의 종류로서 서정시를 우선 꼽는 데 서정시란 주관적 관념을 토대로 한 개인시라고도 부른다.
개인의 주관적 사상, 감정,소망 등을 표현한 시를 지칭한다. 옥스포드 사전에서 보면 서정시란 시인의 사상과 감정을 일반적으로 그리 길지 않게 연이나 절 속에 표현하는 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당(未堂)의 서정시관은 동양에서 서정시라 번역된 소위 리릭(Lyric)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이 리릭이 꼭 서정이라는 말이 보이는 것만은 아니며, 감정 내용을 표현 할 수 있는 양식이 된다라 하였다.
또한 <허드슨>은 서정시의 정수는 그 개성에 있지만 세계적인 위대한 서정시의 대다수는 단순히 개성적이고 특수한 것보다 인간적인 것을 구체화시켰다는 사실에 광범위하게 문학사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서정시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 설명한다면, 순수감정을 표현한 시라고 할 것이며, 시각적 감각적 표현의 시라고 할 것이다.
서정시든 다른 시든 시어는 함축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상과 감정에 대한 내포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메타포어와 이미지를 상징한 직관적 내면성찰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자, 아래에 몇편의 시를 열거 하자면
시몬, 나무 잎새 떨어진 숲으로 가자./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낙엽은 버림받고 땅위에 흩어져 있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시몬, 너는 좋으냐?낙엽 밟는 소리가.//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레미 구ㅡ몽(1838-1915)의 낙엽-
프랑스 출생, 다재다능한 시인으로 평론가이자 소설가인데<시몬느>의 시인으로 더 유명하며, 염세적인 딜레당트였음. 평론집으로<문학적 산보>와<철학적 산보>가 유명하다.
레미 구르몽의 시를 읽으면서 필자는 인생의 자연적 생성소멸을 성찰케 된다. 이 시에서는 한마디로 구슬픈 감정의 소산이다. 직선적인 생명의 윤회사실을 화폭처럼 그려 낸 작품이다.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음을 사실 그대로-누군가 이 처연한 광경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순간에 처절함을 공감하지 않을 자 있겠는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고 노래하는 이 갈급한 찰나의 심정에 부딛는 시인의 가냘픈 울음이 가슴에 와 찡한 것이다. 그럴까? 과연 낙엽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내는 걸까? 날개 소리를 내는 걸까? 설사 그럴지라도 낙엽의 소리는 이별과 죽음의 소리이다.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이 한 마디가 오직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대변하는 내포적 함축적인 메타포적 목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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